[상상사전] ‘말’

▲ 박동주 기자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을 보면 계층에 따라 쓸 수 있는 ‘말’이 다르다. 음성학자인 히긴스는 하류계층 여인 일라이자를 상류계층 귀부인으로 만드는 실험을 한다. 우여곡절 끝에 히긴스는 일라이자를 사교계의 꽃으로 만든다. 이는 일라이자가 입는 옷, 뿌리는 향수, 걷는 모양새 등 외적 요소를 바꿔서 이룬 게 아니다. 하류계층이 가진 말투와 표현, 쓰지도 듣지도 못한 상류계층이 쓰는 ‘말’을 교육함으로써 이룰 수 있었다. 일라이자는 상류층 말을 씀으로써 그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던 셈이다.

말에는 특정 계층의 욕망과 권력 구조가 작동한다. 어떤 발음을 구사하는지,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지, 사용하는 단어의 수준이 높은지, 단어량이 풍부한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사회경제적 계층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영국 영어를 보면 아직도 과거 계층간 대립이 남아있다. ‘워터’(Water)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T가 강조되는 영국 영어는 ‘상류층 영어’(Posh English)다. 실제로 영국에서 2~3% 정도만 구사한다는 상류층 영어는 그들끼리 5초만 대화하면 바로 그 사람의 출신이나 학력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서민 계층은 미국 영어처럼 T를 정확히 발음하지 않는다. 이런 구분 짓기는 계층을 쉽게 나누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기 쉽게 하는 시스템인 셈이다.

▲ 언어학자 사피어는 “언어는 우리가 속한 사회‧지위‧문화적 성격에 맞춰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우리는 그 언어적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고 말했다. ⓒ pixabay

여성을 비하하는 말도 남녀간 권력 관계를 보여준다. 남성은 부인을 “내 와이프” 또는 “여편네”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내”라고 부르는 이는 드물다. 반대로 여성이 남편을 다른 말로 부를 수 있는 단어는 찾기 힘들다. 주목할 사실은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 대부분 그들의 성이나 육체와 연관돼 있다는 점이다. 더러움, 동물성, 악 등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은 오랜 여성 억압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말과 침묵으로 구성되는 대화에서도 남성은 말을 하는 자, 여성은 침묵하고 남성의 말을 경청하는 자로 인지되는 것 역시 남녀간 권력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다. 

권력 관계가 녹아 있는 말은 힘없는 자를 은밀하게 옭아매서 문제다. 예컨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재판에서 재판부가 피해자를 신문하면서 ‘정조’라는 단어까지 거론한 건 이를 잘 보여준다. 보이지 않게 여성인 피해자에게 “당신은 지켜야 할 걸 못 지켰다”고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대체 당신의 정조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왜 거기서 그냥 가만히 있었느냐”는 말은 여성과 남성의 권력 구조에서 위쪽에 속하는 자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정조’라는 단어에는 남성이 여성에게 성적으로 어떠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위력이 담겨 있다. 여성과 남성 관계에서 오랫동안 지배와 순종의 자리에 놓여 있던 여성은 은밀한 위력에 자기도 모르게 그 이데올로기에 스며든다.

언어학자 사피어는 “언어는 우리가 속한 사회‧지위‧문화적 성격에 맞춰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우리는 그 언어적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고 말했다. 말은 그 말을 수용하는 사람의 사고와 가치관도 무의식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안희정이 피해자에게 보낸 문자 속 ‘괘념치 말거라’는 말은 그 무서움을 보여준다. 그 문장 하나로 가해자인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진짜 피해자가 혼란을 느끼도록 한 것이다. 평소 의심 없이 쓰던 말을 멈추고 그 말에 어떤 권력 구조가 숨어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자신이 사용하는 말을, 우리가 쓰는 말을 낯설게 바라볼 때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이정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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