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욱 표 시트콤’ 익숙한 장치 속 새로운 웃음과 감동 기대
[지난주 TV를 보니: 9.14~9.21]

이야기는 한 권의 책에서 시작한다. 2052년, 이제는 백발노인이 된 이적이 자신의 책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도입부를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2011년도 역시 돈, 돈의 해였다.”

▲ 극 중 방송에서 자신의 책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을 소개하는 이적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화면 캡처

이적의 나레이션과 함께 펼쳐지는 영상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2011년의 사건들이 지나간다.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고, 빈 라덴이 죽었으며, TV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점령당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돈이라는 현실.

사실 시트콤은 현실성(리얼리티)을 살짝 무시하고 기발한 상황설정과 천연덕스런 연기를 통해 웃음을 주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화방송(MBC)의 새 시트콤 <하이킥3>는 첫 회부터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보는 이들에게 들이밀었다. 무슨 심산일까?

초라하고 찌질해도 현실인 것을

김병욱 감독은 지난 19일자 <텐(10)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프로파간다(선전물)’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영리하게도 현실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면서 웃음의 포인트를 찾아내고 있다.

▲'위축된 사람'들이 주인공인 '김병욱 표 시트콤'. ⓒmbc 화면캡처

 ‘김병욱 표 시트콤’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뭔가 부족하고 위축된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캐릭터가 능력 부족으로, 또는 사업 실패로 누군가에게 얹혀사는 중년 남자들이다.

<하이킥1>에서 백수인 정준하는 능력 있는 한의사 아버지 이순재와 아내 박해미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 궁상맞게 사는 모습으로 곳곳에서 웃음을 유발했다. <하이킥2>의 정보석도 어리숙한 행동으로 장인과 아내의 구박을 받으며 좌충우돌했다. <하이킥3>의 안내상 역시 첫 회부터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나는 사건을 통해 지지리도 궁상맞은 미래가 펼쳐질 것임을 암시했다.

이런 ‘찌질함’과 ‘궁상맞음’은 한편으로 웃음을 이끌어내는 설정이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씁쓸함을 남긴다. 고개만 돌리면 현실 이 곳 저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초라한 아버지들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안내상의 경제적 몰락과 함께 자녀로 등장하는 크리스탈과 이종석 역시 생계와 장래를 걱정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익숙한 설정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김 감독의 전작 <순풍산부인과>의 박영규와 <하이킥> 시리즈의 정준하, 정보석이 그랬듯 <하이킥3>의 안내상도 더부살이를 한다. 처남 집에 얹혀사는 안내상이 처남 윤계상을 어떻게 대할지는 충분히 상상이 된다.

▲ 병원에서 환자의 항문을 진찰하는 항문외과 전문의 이적.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화면 캡처

반복되는 것은 더부살이 설정만이 아니다. ‘똥’ 같은 소재도 재활용된다. <하이킥1>에서 평소 너무 깐깐한 며느리 박해미를 미워하던 나문희가 며느리의 똥을 발견하고 기뻐하던 모습, <하이킥2>에서 김자옥이 이순재의 집에 갔다가 변기 물이 내려가지 않아 한바탕 소동을 벌이던 모습 등이 <하이킥 3>에서도 이어진다. 이번에는 아예 이적을 항문외과 의사로 설정하고 첫 회부터 그가 환자의 항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장면을 넣었다.

그러고 보면 주변 인물 중에도 전작의 캐릭터와 겹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착하고 순수하지만 덜렁대는 선생님 박하선은 <하이킥1>의 서민정과 겹치고, 몽둥이를 들고 아이들을 잡으러 다니는 윤지석(서지석)은 최민용을 생각나게 만든다. 운동 신경 뛰어나고 잘생겼지만 공부는 못하는 안종석(이종석)은 정일우와 윤시윤의 재현 같다. 윤계상이 맡은 따뜻하고 배려심 깊은 의사는 <순풍산부인과>의 이찬우, <똑바로 살아라>의 이창훈, <하이킥2>의 최다니엘이 이미 거쳐간 캐릭터다. 아주 새로운 캐릭터라고 한다면 가난하지만 열심히 사는 몽유병 여대생 역의 백진희 정도다. 그래서 일부 시청자들은 첫 회와 등장인물 소개만 보고도 <하이킥3>를 다 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짧은 다리로 하이킥!

하지만 그래도 <하이킥>이고, 그래도 김병욱이다. 김병욱 감독은 비슷한 등장인물과 관계 설정을 가지고도 늘 새로운 재미를 주지 않았던가. <하이킥1>에서는 개성댁 살인사건이나 북파공작원인 유미네 가족 등을 이용한 스릴러 구조로 시트콤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하이킥2>에서는 최다니엘과 황정음, 신세경과 윤시윤의 가볍지 않은 러브스토리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했다. 이번 <하이킥3>에서는 본격적으로 돈에 얽힌 현대인의 애환을 조명할 것으로 보인다. 

▲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취업 준비생 백진희(좌)와 고시생 고영욱(우).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화면 캡처

<순풍 산부인과>의 박영규, <하이킥1> 정준하의 경우 각각 무능한 가장이 된 이유를 짧은 회상으로만 다뤘지만 <하이킥3>는 안내상의 몰락을 첫 회부터 상세히 보여주었다. 더불어 도시빈민 고영욱, 백진희 등의 캐릭터를 전면에 배치한 것은 ‘중산층의 몰락’과 ‘88만원 세대의 고통’을 조명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돈에 치이고 일그러진 시대에 ‘하이킥’을 날리겠다는 제작진의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지난 19일 방영된 <하이킥3>의 첫 회 시청률은 12.9%(AGB닐슨미디어리서치, 수도권 기준)로 역대 하이킥 시리즈의 첫 회 성적 중 가장 높다. 지난 주 종영된 전작 <몽땅 내 사랑>이 평균 10.1%, 최고 14.4%의 시청률을 냈던 것과 비교한다면 ‘역시 하이킥!’ 이라는 감탄사가 나온다. 그러나 성공한 전작들의 뒤를 잇는 프리미엄과 ‘김병욱’이라는 이름에 대한 기대치가 선 반영된 결과임을 생각해볼 때 성공을 축하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 땅의 무수한 짧은 다리들에게

▲ 회사 부도 후 길거리로 나앉은 안내상의 가족.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화면 캡처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라는 제목에서 ‘짧은 다리’는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존재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이킥1>의 ‘짧은 다리’ 정준하는 결국 주식 부자가 됐고, <하이킥2>의 정보석 역시 마지막에는 회사의 경영자로 성공했다. 그렇다면 무능한 가장으로 전락한 안내상도 화려한 재기를 하지 않을 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고단한 현실을 헤쳐 가는 고영욱과 백진희에게도 볕들 날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때로 시트콤보다 더 시트콤 같은, 기막힌 세상을 살고 있는 이 땅의 서민들을 <하이킥3>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지, 앞으로의 전개가 무척 궁금해진다. ‘짧은 다리들’의 대반란을 현실성 따지지 말고 통쾌하게 그리는 것, 시트콤이기에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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