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영화 ‘우리집’과 ‘걸어도 걸어도’

남자라면 알지만, 남자라서 입 밖에 꺼내지 않는 세계, 소년의 내상(內傷)이 있다. 여자라면 많은 말을 하지만, 말이 문제 그 자체임은 모르는 세계, 소녀의 내상이다. 사춘기 소년∙소녀의 번민과 성장을 치열하게 그린 영화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는 애 딸린 과부와 결혼한 료타가 아버지 집에 찾아가 하룻밤 묵고 오는 이야기다. 늙은 아버지, 장년의 아들 료타, 의붓아들 3대가 나오지만, 이야기는 료타의 소년 시절 위주로 전개된다. 료타가 어린 시절 살던 집으로 돌아가는 데다, 집 주인이 여전히 료타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 딴청, 침묵, 신문읽기.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법이다. ⓒ 영화 <걸어도 걸어도>

집, 가족이 소년∙소녀에게 던지는 원형적 의미

소년의 내상을 그린 <걸어도 걸어도>에는 한 집만 등장하지만, 소녀의 내상을 그린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2019)에는 두 집이 나온다. <우리집>은 부모의 이혼을 막고 싶은 열두 살 소녀 하나와 매번 낯선 동네로 이사가야 하는 유미∙유진 자매가 친구가 되는 이야기다. 소녀들은 각자 ‘우리집’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가까워진다. 하나는 일로 바쁜 엄마와 살고, 유미∙유진은 엄마와 아예 떨어져 산다. 하나는 유미∙유진 집에 놀러 가거나 자기 집에 자매를 초대해 밥을 해 먹인다.

한 지붕 아래 한솥밥 먹으니 소녀들은 식구다. 이것은 소녀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우리 집’이다. 소녀들은 자기 집도 모자라 서로의 집까지 지키겠다며 과도한 의무감에 사로잡히는데, 이는 소녀가 엄마에게서 충족하지 못한 친밀감을 단짝과 '하나’가 돼 보상받으려는 심리다. 소녀는 엄마의 부재를 단짝의 존재감으로 채운다.

소녀의 인간관계는 ‘엄마-딸-여동생-단짝’의 역학관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소녀에게 모녀 관계는 씨줄이고 친구 관계는 날줄이어서 이들은 모두 한 지점에서 만난다. 관계가 시작되고 때로 뒤틀리다 다시 회복되기까지 모든 과정이 오직 말을 통해서 이뤄지는 점도 소녀 세계의 특징이다. 지나친 밀착만큼 서로를 위하는 무수한 말도 문제다.

▲ 소녀들의 관계는 마치 한 몸인 것처럼 긴밀하다. ⓒ 영화 <우리집>

두 영화는 가족이 중심 소재여서 가장 중요한 미장센(시각적 연출)도 집이다. <걸어도 걸어도>의 집은 소유주가 료타의 아버지다. 그는 분명히 밝힌다. “이 집은 내가 일해서 지은 집이다.” 평생 의사로 일한 료타의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 때문에 의사가 됐다고 말한다. 료타의 의붓아들에게는 ‘의사가 좋다’며 슬쩍 웃음을 보인다. 그가 료타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도 아마 아들이 의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곳간에 들어선 료타는 자신이 물려받을 열쇠가 없다는 사실에 새삼 좌절하면서 어릴 적 일기장을 찢어버린다. “저는 커서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겠습니다.” 유년기 한 페이지가 찢어져 나간다.

소년, ‘아버지 죽이기’에 나서다

소년이 집을 극복하는 일이란 ‘내 집이야’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만큼 큰 집을 마련해낸 아버지보다 더 유능한 의사가 되고 더 큰 집을 마련하여 아버지에게 자기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아들이 신체적 우위로 아버지를 이기는 방법도 있다. 부자간 ‘레슬링’으로 승패를 결정짓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상징적으로 아버지를 죽인다. 자신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중요한 타인을 마음 속에서 지워내는 것이다. 경쟁에서 아버지를 이기면 갈등은 마무리된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분리되고 독립한다. 오이디푸스적 해결이다.

료타가 제때 처리하지 못한 ‘아버지 죽이기’는 ‘알아서 죽는 아버지’로 달성된다. 앞집 할머니가 응급차에 실려 갈 때 료타의 아버지는 ‘나는 의사’라며 뛰어들지만, 구급대원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뒤로 가라’는 말뿐이다. 이 장면을 료타가 목격한다. 힘 있는 아버지는 상징적으로 소멸하고 그를 향한 미움도 함께 끝난다.

▲ 아버지는 이제 두려워할 상대가 아니다. ⓒ 영화 <걸어도 걸어도>

<우리집>에서 중요한 미장센은 하나와 유미∙유진이 함께 만드는 ‘종이집’이다. 박스를 모아 붙이고 색칠하고 가족을 그려 넣는다. 어린 아이들이 함께 하는 놀이를 통해 원형적으로 표현된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하는 최초의 가족, 혈연관계에 기반한 ‘원가족’(archetypal family)이다.

소녀가 내상을 극복하는 일도 결국 중요한 타인을 죽이고 분리된 개체로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하지만 소녀의 ‘엄마(혹은 엄마 같은 존재) 죽이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아버지와 아들은 동성(同姓)으로 경쟁하는 관계지만, 엄마와 딸(같은 관계)은 동일화하는 관계다. ‘나’를 보살피듯 ‘너’를 보살핀다. 소녀가 단짝을 만드는 이유도 서로 보살피는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녀들의 지나친 밀착과 연대는 ‘나’를 사라지게 한다

엄마의 보살핌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하나가 엄마의 손길을 일상에서 거의 느끼지 못하는 유미∙유진 자매에게 엄마 같은 언니가 돼준다. 이때 적당히 돌본다는 것은 어렵다. 남을 먹이느라 자신은 잘 먹지 못한다. 문제는 헌신적으로 돌보는 관계에서는 상대에게 반항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상대를 미워하면 더한 죄책감으로 자신이 복수당한다. 지나친 밀착으로 각자 정체성이 사라진다. 소녀에게는 ‘우리’ 관계만 남고 정작 ‘나’는 없다. 유독 소녀에게 ‘우리 집’의 해체가 지구 종말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영화는 하나의 가쁜 숨소리로 시작한다. 부모님이 싸울 때, 하나는 그 정도로 두렵다. 몇 살 많은 하나 오빠에게는 화나는 순간일 뿐이다.

두 영화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다’ 미장센이다. <걸어도 걸어도> 마지막 장면에서 부자 3대는 집을 나와 바다로 향한다. 셋은 일렬로 걷는다. 료타는 늙은 아버지 뒤로 간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료타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라이벌이 아니다. 이제 아들이 할 일은 ‘나이 들어가는 것과 싸우는 아버지를 돕는 일’이다. 하얗게 센 머리는 권위가 아니라 ‘한때 타올랐던 적이 있구나’ 하고 짐작게 하는 잔재물일 뿐이이다. 흩어질 일만 남은 육신을 가진 아버지는 이제야 제 자식을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해준다. “축구장 같이 갈까? 저 녀석 데리고.”

▲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정신적 분리를 선언하면서 아버지와 화해한다. 화해한 부자의 대화법 역시 딴청, 침묵, 신문 읽기다. ⓒ 영화 <걸어도 걸어도>

아버지와 화해하는 소년, ‘대안가족’을 만드는 소녀

<걸어도 걸어도>에서 바다는 모든 갈등이 해소된 ‘궁극’의 공간이지만, <우리집>에서 바다는 인물들이 극한의 갈등을 경험한 뒤 그것이 기회가 되어 해결을 기대하게 만드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유미와 엄마 사이에 연락이 닿지 않자 하나는 유미 엄마가 일한다는 보리 해변으로 찾아가자고 제안한다. 하나도 남을 구원해줄 처지는 아니다. 부모님이 이혼을 준비한다는 걸 알게 됐다. 소녀들은 서로가 미워서가 아니라 가족이 미워서, 서로에게 너그럽지 못하게 되고, 날 선 말을 쏟아낸다. 길을 잃은 소녀들은 보리 해변은 아니지만 어느 바닷가에 다다른다.

바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공간이다. 무언가 잠겨있으리라 짐작하지만 실체는 모른다. 인간의 무의식 같다. 막내 유진이 바다까지 애지중지 가져간 종이집은 인간이 원가족 관계에서 경험한 일들로 형성한 무의식이다. 가족 생각에 화가 난 하나와 유미는 종이집을 짓밟는다. 기본부터 틀려먹은 ‘우리 집’을 무너뜨리고 나니 소녀들의 마음이 조금 풀린다. 그런 소녀들 앞으로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가 지나간다. 자궁의 양수처럼 바닷물은 모성을 연상하게 한다.

임산부가 남편과 자리를 뜨면서 바닷가에는 텐트와 따뜻한 먹을거리가 남았다. 임산부가 엄마가 되려는 즈음, 엄마의 따뜻한 보호에 굶주린 소녀들은 뜨거운 고구마 껍질을 스스로 벗겨 먹는다. 텐트에 들어가 살을 맞대며 모여 눕는다. “물고기 잡아먹으면서 여기서 살까?” 소녀들은 텐트에서 한여름 밤 꿈 같은 상상을 해본다. 텐트는 원가족에 대비되는 ‘대안가족’이다.

<우리집>은 원가족에서 아픔을 겪은 소녀들이 그것을 치유하고 회복해 재생산(출산)으로 나아갈 선순환의 가능성을 '상처받은 소녀들 간 연대’라는 방식을 통해 제시한다.

최초로 제출된 여자아이의 원형적 정신성장보고서

아버지와 경쟁하고 화해하면서 성장하는 남자아이의 원형적 정신세계는 논문∙소설∙영화 등 다양한 형식으로 많이 제출되었다. 여자아이의 경우는 없다. 칼 융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대비되는 ‘일렉트라 콤플렉스’를 언급한 바 있으나, 거의 인용되지 않는다. 이렇게 된 건 여자아이의 경우 ‘기투적(企投的) 존재성’보다 ‘피투적(被投的) 존재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주체로서 상황의 의미를 ‘규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규정당하는’ 존재라는 인식이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은 아마도 기투적 존재성에 기반한 여자아이의 원형적 정신성장보고서를 제출한 최초 사례가 될 것이다.

문제는 ‘여자들끼리 연대’

소녀들은 인간 관계를 자기 나름의 의미로 규정하려는 '기투적 존재'다. 하지만 바다까지 쏘다닌 하나가 집에 돌아와 가족에게 하는 말은 결국 이거다. “우리 밥 먹자.” 큰 모험을 했으나 생각은 제자리걸음이다. 타인과 정신적으로 분리되지 못한 소녀는 언제나 뫼비우스 띠 위에 서있다. 시작도 끝도 없으며 안팎도 없다. 소녀 세계의 비극은 이처럼 ‘너나없이 되는 것’, 즉 타인과 ‘하나 됨’에 있다. 영화는 문제적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 소녀들이 연대를 꿈꾼 텐트는 피난처지만 임시 거처다. ⓒ 영화 <우리집>

고민은 지금부터다. 소녀는 문제투성이 원가족에서 자랐다. 지금은 이질적 구성원들과 연대해 대안가족을 경험한다. 극장을 나온 어른으로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미래에 엄마가 된 하나와 유미∙유진의 ‘우리 집’은 어떨까?

관객이 소녀의 슬픔에 설득돼버리면 소녀의 현실을 개선해줄 수 없다. 관객은 소녀 세계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에 그 세계 밖에 있어야 볼 수 있는 문제를 보지 못한다. 문제 상황인 줄 몰라서 문제다.

해법은 분리다. 하나와 유미∙유진이 텐트를 전전하지 않고 안정적 가정을 꾸릴 수 있으려면, 외부의 조력자가 필요하다. 서로 보살피며 하나가 되는 소녀들의 밀착 관계를 끊어낼 제3자가 필요하다. 끝없이 뒤엉키며 자신을 잃어가는 소녀들 사이에 끼어들어 건강한 균열을 내는 역할이다. 정신의학자 카롤린 엘리아셰프가 말하듯,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 사람의 관계를 구축하려면 딸과 어머니(혹은 어머니 같은 존재) 그리고 ‘당신’이 필요하다. 당신, 아빠다.

이혼이건 이유(離乳)건, 이별은 관계에서 상대가 빠져나가는 것이다. 소녀는 애착상태에서 중요한 타자를 잃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 대상을 떠나 보내면서 상실감 또한 떠나 보낼 수 있도록, 일관된 애정으로 슬픔을 격려해줄 어른이 필요하다.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소녀의 정신적 자립을 돕는 일이다.

▲ 가족이 무엇이고 이별이 무엇이고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하는 건, 어린아이에게 시간 낭비다. ⓒ 영화 <우리집>

‘나’를 지키기 위해 ‘우리 집’을 지켜야겠다며, 우리 집에서 제일 작고 약한 생명이 외로운 책임감을 걸머진다. 도대체 왜 이 어린 것이 가장 강해져야겠다고 결심해야 하는가? 판을 흔드는 물음이 필요하다.


편집 :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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