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52. 한·일 유물로 본 옛 교역

1973년 문화재 당국이 황남동 155호 고분으로 불리던 대형 봉분무덤을 발굴한다. 화려한 금관을 비롯해 수많은 부장품, 특히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말의 모습이 그려진 다래가 나온다. 다래는 말안장 밑에 흙이 튀어 오르지 않도록 다는 도구를 가리킨다. 다래의 말 그림을 따 천마총이라 부른다. 이 천마총에서 출토된 푸른색 유리잔은 1979년 보물 620호로 지정된다.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가서 실물을 보자. 보물이라고 해서 황남대총 남분 등에서 나온 국보 유리잔에 비해 제작기법이나 미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표면에 올록볼록한 질감을 주는 기법이나 짙은 쪽빛으로 빛나는 색상은 어느 유리그릇보다 돋보인다. 1500년을 넘어 원색 그대로 오롯이 빛나는 쪽빛 유리잔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황남대총 11점, 금령총 2점 등 25점이 출토된 신라고분 유리 가운데 무슨 색상이 제일 많을까? 쪽빛이다.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는 쪽빛 유리잔들은 어디서 왔을까? 일본발 경제전쟁으로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강화하자는 자성과 함께 자유무역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요즘, 유리그릇을 통해 고대 실크로드 자유무역의 실상을 들여다본다.

▲ 로마문화를 상징하는 폼페이는 쪽빛 로마유리가 많이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폼페이 티베리우스 개선문과 그 주변의 풍광. 왼쪽 위 사진은 천마총 유리그릇. ⓒ 김문환

오사카 근교 사카이 인덕천황(仁德天皇)릉 쪽빛 유리

일본 오사카 근교 사카이로 가보자. 일본의 거대 무덤인 4∼6세기 전방후원묘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다. 사카이 박물관으로 가면 입구에 큼직한 석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 무덤 출토품을 복제, 전시해 놨다. 기마민족의 문화를 상징하는 투구 옆으로 투명한 유리접시 위에 쪽빛 유리병이 반짝인다. 천마총 출토 유리잔과 같은 쪽빛 색상은 물론 표면 상부의 줄무늬, 하부의 올록볼록한 표면처리 기법까지 닮았다. 일본 인덕천황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이라는 안내판이 붙었다.

인덕천황은 720년 쓰인 일본정사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일본 16대 천황으로 재위기간은 313년부터 399년까지로 나온다. 313년이면 고구려 미천왕이 평양유역에서 낙랑군을 최후로 몰아낸 시기다. 399년은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침략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대군을 출동시킨 해다. 하지만 인덕천황의 정확한 생몰연대나 재위기간을 알기는 어렵고, 유리그릇의 연대를 대략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본다.

▲ 위에서부터 도쿄 박물관의 아시아 유리 접시, 중국 박물관에 전시된 로마 유리 접시와 동로마 제국 동전, 나폴리 박물관의 로마 유리잔. ⓒ 김문환

오사카 근교 하비키노 안한천황(安閑天皇)릉 쪽빛 유리

도쿄 국립박물관 고고학관으로 가보자. 3점의 유리 가운데 쪽빛으로 반짝이는 접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박물관 설명문을 보자. 오사카 근교 하비키노의 안한천황릉에서 출토했다고 적혀 있다. 안한천황은 531년 즉위해 536년 사망한 것으로 ‘일본서기’나 ‘고사기(古事記)’는 기록한다. 6세기 중반이다. 도쿄 국립박물관은 유리그릇을 ‘서아시아 제품’이라고 적어 놓았다. 4세기에서 6세기 서아시아는 로마의 영토였으니, 로마제국의 유리라는 얘기다.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 경주박물관은 시리아나 레바논이라는 지역을 더 구체적으로 적었다. 이 지역은 로마시대 1세기경 입으로 불어 유리그릇을 대량생산하는 방법이 시작된 곳이다. 로마 유리를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자.

레바논과 폼페이의 쪽빛 로마유리

레바논은 경기도만한 크기지만, 지역별로 기후나 식생이 전혀 다르다. 고산지대가 있는가 하면 사막지대, 지중해 연안은 비옥하기 그지없고 온화한 날씨다. 인류사 최초로 독창적인 형태의 전용 알파벳을 BC 12~BC 11세기 완성시켜 현대 지구촌 알파벳 역사를 개막한 페니키아의 나라가 레바논이다. 로마의 박물학자인 플리니우스는 1세기 ‘박물지’에서 페니키아인들이 모래를 활용해 유리를 발명했다고 적는다. 물론 유물을 통해 보면 페니키아에 앞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리를 생산했지만, 그런 유물들을 볼 수 없던 로마시대에는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지대를 유리의 고향으로 본 것이다.

수도 베이루트 국립박물관은 지금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페니키아 문자가 적힌 BC 10세기 아히람왕 석관을 비롯해 2층 유리 전시실에 쪽빛 로마 유리병을 전시 중이다. 이곳만이 아니다. 로마의 생활문화가 매몰됐다 그대로 되살아난 폼페이 유물의 보고, 나폴리 국립박물관으로 무대를 옮겨보자. 다수의 1세기 쪽빛 로마 유리그릇들이 탐방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폼페이 로마시민들부터 서아시아 로마인들 나아가 동아시아 지배계층 사람들이 권위와 품격을 높이기 위해 활용했던 무역의 산물 로마유리를 중국에서도 볼 수 있을까? 한국과 일본에서 로마유리가 출토되는 5∼6세기 동아시아의 중심국가이던 중국으로 무대를 옮겨보자.

서안의 로마유리, 동로마제국 주화

서안 섬서성 박물관은 북경 국가박물관과 함께 중국 역사를 연대순으로 일별하기 좋은 탐방장소로 손꼽힌다. 13세기 몽골의 대원제국 이후 수도가 된 북경과 달리 서안은 BC 11세기 중국 주나라의 수도 호경이 있던 곳이며, 이후 당나라까지 2000년 가까이 중국 역사의 중심 무대였다. 유적은 물론 천하의 중심을 자처한 중국이 외국과 문물을 주고받던 수도여서 당시를 증언하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는 역사고도다. 중국에서도 많지는 않지만, 로마유리가 발굴되는데, 서안 섬서성 박물관도 서안에서 출토한 로마의 유리접시를 전시 중이다. 서안에서 출토한 로마 유리 숫자는 한국이나 일본보다 적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볼 수 없는 유물이 출토돼 관심을 모은다. 유리라는 교역의 대상을 넘어 교역의 수단이다.

교역의 수단은 무엇일까? 화폐다. 돈이 있어야 물건을 사고판다. 서아시아에서 로마유리를 갖고 들어온 상인들은 화폐를 사용했을 터이고, 유물로 남겼을 게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서안에서 출토돼 북경 국가박물관에 전시 중인 동로마 제국 화폐는 탐방객에게 귀한 선물에 가깝다. 동로마 제국이란 무엇인지 간략히 살펴보자. 393년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로마제국을 동서로 분할해 큰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수도로 한 동로마제국을 상속한다. 작은아들 호노리우스 황제에게는 로마를 수도로 한 서로마 제국을 떼어준다. 동아시아로 들어오던 로마유리의 생산지 시리아와 레바논은 동로마제국에 속한다. 이 동로마제국의 화폐가 중국에서 출토되니 동서 무역교류의 실상이 확실하게 눈에 잡힌다. 그렇다면 로마 유리와 주화는 어떤 경로를 타고 당시 중국 역사의 중심지 서안과 한국 나아가 일본으로 전파됐을까?

한나라 때 개척한 실크로드 카슈가르 반초성(班超城)

지도를 펼쳐놓고 중국 지도를 보자. 북쪽 끝은 몽골초원보다 훨씬 북으로 올라가는 동시베리아다. 남쪽은 베트남 수도 하노이보다 더 남으로 내려가는 해남도다. 서쪽은? 광활한 신장 위구르 자치주의 사막지대다. 여기서도 가장 서남쪽에 자리한 도시 카슈가르로 가보자.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가까운 국경도시다. 신장 위구르 자치주의 주도인 우루무치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2시간을 가야 할 만큼 멀다. 카슈가르 시가지는 여타 중국 도시는 물론 위구르 자치주의 주도 우루무치와도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코카서스 인종인 위구르인이 많이 보이는 것은 물론 거리의 건축 양식도 이슬람 양식이어서 중국 한족 전통과 차별화된다.

이 카슈가르에 반초성이라는 기념지가 자리한다. 한가운데 이 지역을 평정하며 실크로드 상권을 보호했던 한나라 관리 반초의 동상이 우뚝 솟았다. 좌우로 그를 보좌했던 장군과 관리들 동상이 열병식 치르듯 늘어섰다. 잠시 실크로드의 역사를 더듬어보자. 한나라 무제(재위 BC 141∼BC 87년) 때 BC 139년경 무제의 명을 받은 장건이 월지와 동맹을 맺기 위해 서역으로 떠난다. 비록 월지와 동맹에는 실패하지만,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주, 중앙아시아 각국을 다니며 현지인과 접촉한 것은 물론 현지 상인을 대동하고 현지 물품도 갖춰 귀국한다. 실크로드의 개막이다. 이후 BC 59년 한나라는 이 지역에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세우고 관리를 보낸다. BC 16년 폐쇄됐던 서역도호부는 얼마 뒤 다시 복원되고, 그 주역이 역사책 ‘한서(漢書)’를 쓴 반고의 동생 반초다. 반초는 73년부터 102년까지 서역도호부에 머물며 이 지역을 한나라 영역 아래 두는 한편 실크로드 상권을 보호한다. 그 중심지가 당시 소륵(疏勒)으로 불리던 카슈가르다. 중국이 이를 기념해 카슈가르 고성 터를 반초성으로 복원한 거다. 한나라는 서역도호부의 영토를 다시 잃는다. 하지만 이 지역은 동아시아와 서양세계를 이어주는 실크로드 동서교역의 장으로서 역할을 이어간다.

실크로드 교역도시 팔미라의 중국비단과 로마유리

카슈가르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실크로드 선상의 교역도시 시리아의 팔미라로 가보자. 지금은 국제전으로 비화된 내전으로 생지옥이 따로 없는 땅이 됐지만, 필자가 찾았던 2000년 팔미라는 놀라움 그 자체의 사막 유적지였다. 사막 한가운데 신기루처럼 서 있던 팔미라 유적지에는 작은 박물관도 있는데, 여기에 중국제 비단이 전시돼 있었다. 중국 비단이 실크로드를 통해 팔미라까지 유통되는 교역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제노비아 여왕이 통치하며 독립국가를 일궜던 260~271년 사이 절정의 번영을 이룬 팔미라. 동서를 잇는 무역도시로서의 기능은 이후로도 이어진다. 중국비단이 온 팔미라에서 거꾸로 서아시아산 로마유리는 중국으로 갔고, 신라와 일본으로도 팔려 나갔다. 오늘 우리가 로마유리라는 유물로 보는 4∼6세기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자유무역의 실상이다.

■ 용어설명

- 실크로드 : 비단길, 실크로드(Silk Road)는 근대 이전 육상과 해상을 통한 동서 교역로를 가리킨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1877년 ‘중국(China)’ 1권에서 ‘실크로드(Seidenstrassen)’라고 명명한 것에서 비롯됐다. 중국 중원지방에서 시작해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을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오랜 연구 성과를 통해 남북의 여러 통로를 포함해 동서남북으로 연결된 거대한 범세계적 그물 모양의 교통망 개념으로 확대됐다.

-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 : 중국 한나라대에 설치한 서역 통치기구. 중국 서한(西漢) 시기인 기원전 59년 오루성(烏壘城), 현 신장 윤태동야운구(輪台東野云溝) 부근에 설치됐다. 주 역할은 서역의 침략을 방어하고, 실크로드를 지키는 일이다. 서역으로의 통행이 막히자 기원후 16년에 폐쇄되기도 했으나 동한(東漢) 때 다시 복원됐다. 그 뒤 다시 폐쇄되기를 두 번이나 반복했다. 당대 초기에는 서역 통치기구로서 ‘서역도호부’라는 명칭이 그대로 유지됐으나 640년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로 바뀌었다.


편집 : 김현균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