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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도공이 길 터준 일본 수출산업
[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㊿ 자유무역
2019년 08월 20일 (화) 11:11:06 김문환 kimunan2724@hanmail.net

일본 도자기 산업의 중심지 아리타

일본 규슈 하카타항으로 가보자. 부산에서 쾌속선을 타면 3시간 걸린다. 가깝다. 비행기로 가면 하카타항을 포함하는 대도시 후쿠오카 공항으로 도착한다. 일본제품 불매운동의 일환으로 많은 국민이 일본 여행을 중단하기 전까지만 해도 후쿠오카는 한국 관광객으로 붐볐다. 후쿠오카역에서 사세보로 가는 철도를 타면 백제 무령왕의 출생지 가카라시마가 있는 사가현이 나온다. 사가역을 거쳐 나가사키로 가는 분기점 히젠 야마구치역을 지나면 한적한 시골 도시 아리타(有田)에 이른다. 분위기가 남다르다. 낡은 일본식 기와 건물 내부에 진열된 상품들이 유독 반짝이듯 눈에 들어온다. 도자기. 아리타는 일본 도자기를 대표하는 도시로 손꼽힌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구석구석 특색 있는 가마를 찾아다니는 탐방객이 있을 정도다. 어떻게 이런 명성을 얻었을까? 역에서 북쪽으로 40분여 걸어 올라가면 도산신사(陶山神社)라고 쓴 도리이(鳥居)가 눈앞에 나타난다. 안으로 들어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높이 솟은 비석과 마주친다. 비문을 읽어보자. ‘도조 이삼평 비(陶祖李參平碑). 일본 도자기의 시조로 불리는 도자기 명인 이삼평의 묘지 비석이다. 이삼평. 한국 출신인가?

   
▲ 아리타 시가지 도자기 상점. 한적한 시골 도시 분위기다. ⓒ 김문환
   
▲ 도산신사 도리이. 아리타. ⓒ 김문환
   
▲ 도조 이삼평 비. 아리타 도산신사. ⓒ 김문환

아리타 도자기,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이 기원

1592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은 중국이 한국을 지속해서 침략했다는 거다. 676년 당나라와 신라가 오늘날 군산 앞바다에서 기벌포 해전, 22년 뒤 698년 당나라와 발해의 대조영이 만주에서 천문령 전투를 펼친 것을 끝으로 1950년 6·25 때까지 중국 한족과 한국은 1252년 동안 전쟁을 벌인 적이 없다. 중국의 한족을 지배한 북방 유목민족들 즉 거란, 여진, 몽골이 한국을 침략해 온 거다. 우리가 대륙의 기마민족에 침략당할 때 한족도 같이 공격받았다. 반면 한국은 1274년과 1279년 두 차례 몽골과 연합해 일본을 침공했다. 1592년에는 반대로 일본이 선제적으로 쳐들어왔고,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다시 한국을 침략해 지배한 거다. 1252년 동안 한국-중국의 우호 분위기와 달리 한국-일본은 갈등하고 전쟁을 치른 사실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명나라와 일본의 휴전 협상으로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던 임진왜란은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다시 불붙는다. 이를 임진왜란과 분리해 정유재란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듬해 1598년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전쟁을 중단하고 되돌아간다. 이때 많은 포로를 잡아가는데, 규슈 사가 번(藩)의 (藩)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충남 공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데려간 인물이 이삼평이다. 사가번 아리타에 정착한 이삼평은 나베시마 가문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도자기 가마를 연다. 조선의 앞선 도예기술에 명나라의 선진 기법을 더하고 여기에 일본의 전통 회화를 접목해 아름다운 아리타 자기를 탄생시킨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신안 해저 무역선이 말해주듯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무역항로를 통해 도자기를 들여와 생활문화의 격을 높여 왔다. 그러다, 마침내 자체 생산하게 됐고, 일본 전역으로 생산기술을 보급한다.

17세기 일본 최고 수출품은 아리타 도자기

조선 도공의 노력에 힘입어 품격 있는 도자기를 생산한 일본은 한 발 더 나간다. 단순히 국내 생활용품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수출에 나선다. 1650년 나가사키 데지마 섬을 근거로 일본과 교역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145점의 아리타 도자기를 수입한다. 이 도자기들이 유럽인에게 큰 인기를 얻는다. 이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59년 수입 규모를 대폭 늘린다. 5만6700여 점의 자기를 주문한다. 이때 도자기의 대명사 중국은 혼란기였다. 1644년 3월 이자성의 반란으로 명나라가 멸망한 데 이어, 이자성 정부마저 40일 지나 4월에 여진족 청나라에 무너진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전란기에 일본 도자기가 수출 기회를 얻고, 아리타 도자기가 있어 이를 충족시킨다. 이후 70여 년간 아리타 도자기는 유럽으로 무려 700만 점 이상 실려 나간다. 오늘날 유럽 각지 박물관에 일본 도자기가 남아 있는 이유다. 도자기는 현대 일본 자동차 산업이나 첨단 소재산업만큼 당시 일본경제 활성화 효과를 가져온다. 일본 도자기 산업 발전에 공을 세운 인물은 이삼평 만이 아니다. 박평의, 심수관 가문의 시조 심당길을 비롯해 조선에서 간 많은 도공의 뼈를 깎는 노력이 더해진 결과다. 일본은 이렇게 선진기술을 습득한 뒤, 자유무역으로 성장한 나라다. 그렇다면 일본 도자기 산업발전의 계기를 마련해준 임진왜란은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답을 찾아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포르투갈 대서양 연안으로 가보자.

   
▲ 발견의 탑. 타구스강 북단에 자리한다. 포르투갈 리스본. ⓒ 김문환
   
▲ 엔리케 왕자와 대항해 선구자들. 포르투갈 리스본 발견의 탑. ⓒ 김문환

발견의 탑, 15-16세기 포르투갈 신항로 개척 상징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은 타구스강과 대서양이 만나는 천혜의 무역항이다. 리스본 시가지를 남북으로 가르는 타구스강 북단에 우뚝 솟은 발견의 탑 앞으로 가자. 탑은 15~16세기 세계 대양을 누비던 포르투갈 범선인 카라크(일명 나오스)선을 본 딴 형태다. 뱃머리에서 결연한 눈빛으로 대양을 응시하는 주역들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맨 앞은 15세기 포르투갈의 항해 시대를 연 엔리케 왕자다. 그 뒤로 항해의 선구자들이 2줄로 따라가는 구도다. 엔리케 뒤 왼쪽(동쪽) 줄에는 인도항로를 발견한 바스쿠 다가마, 브라질을 발견한 카브랄,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일본에 기독교를 전한 선교사 사비에르 등 16명을 세웠다. 오른쪽(서쪽)에도 탐험가 겸 작가 핀 투를 비롯해 16명이니 합쳐 33명의 선구자를 새겼다. 지금은 포르투갈의 위상이 유럽대륙의 작은 나라로 쪼그라들었지만, 15~16세기 지구촌 문명발전을 주도한 선도국가였음을 잘 보여준다.

   
▲ 카라크선 모형. 15세기 포르투갈이 사용했던 범선이다. 리스본 해양박물관. ⓒ 김문환

포르투갈이 인류 무역사에 남긴 위업을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포르투갈은 서양 역사에서 처음으로 인도와의 직교역을 위해 해양 탐험에 나선다. 당시 과학기술 수준과 정보로 인도항로 개척은 요즘 우주로 가기보다 더 어렵다. 현대의 우주선은 다른 행성으로 가거나 태양계를 벗어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이미 정확한 목표와 통과지점, 일정표를 정밀하게 짜고 떠난다. 우주선의 진행정보도 사진으로 고스란히 지구에 전송된다. 하지만, 15세기 대항해 시대는 모든 게 불투명한 채 베일에 가렸다. 인도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 외에 나머지는 깜깜한 상태였다. 오직 모험심 하나로 하나씩 기술을 발전시키고 그에 맞춰 항로를 찾아낸 포르투갈 항해 선구자들의 용기와 노력은 대단하다는 칭찬이 부족하지 않다. 비록 훗날 서양의 탐험과 발견이 제국주의로 이어져 숱한 부작용을 낳았지만 말이다.

   
▲ 벨렝탑. 타구스강과 대서양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다. 포르투갈 리스본. ⓒ 김문환
   
▲ 바스쿠 다가마. 리스본 해양박물관. ⓒ 김문환

리스본 벨렝탑, 포르투갈 대항해 무역 상징

타구스강 북단 발견의 탑에서 서쪽으로 15분쯤 걸으면 벨렝(Belém) 탑이 나온다. 벨렝은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의 포르투갈식 발음이다. 발견의 탑은 엔리케의 주도 아래 아프리카 서해안 종단을 위해 떠난 배들과 15~16세기 포르투갈의 모든 항해 활동을 기려 1960년 세웠다. 새물내 물씬 풍긴다. 높이 52m, 길이 46m다. 벨렝탑은 성격이 다르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하고 그의 길 안내로 바스쿠 다가마가 1498년 인도항로를 개척한 항해업적을 기린다. 건축연대도 앞선다.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한 16년 뒤, 1514년 착공해 1519년 완공시켰으니 대항해 시대의 위상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13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고딕 양식을 포르투갈이 변형 발전시킨 마누엘 양식의 높이 30m, 4층짜리 해양요새다. 1502년 완성된 근처 제로니모 수도원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명물이다.

   
▲ 이동 기도 제단.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항로 개척 시 사용한 제단. 15세기. 리스본 해양박물관. ⓒ 김문환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은 현대 무역사는 물론 세계사를 다시 쓰는 계기였다. 포르투갈은 1505년 알메이다를 첫 인도총독으로 파견해 총독부를 설치하고 대아시아 무역 시대를 연다. 향료가 나는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와 필리핀으로 무역 거래를 확대해 큰돈을 번다. 서쪽으로는 남아메리카로 가 식민지를 건설한다. 브라질의 모태다. 벨렝탑은 16세기 세계로 뻗어가던 무역 대국 포르투갈 상선이 드나들던 리스본의 관문이자 입출항 통제기관이었다. 벨렝탑을 떠나 말루쿠 제도로 갔던 무역선과 상인들이 일본의 운명을 바꾼다.

   
▲ 알 메이다. 포르투갈의 초대 인도 총독(1505년~1509년). 리스본 해양박물관. ⓒ 김문환
   
▲ 16세기 포르투갈 해외무역 항로. 리스본 해양박물관. ⓒ 김문환

1543년 포르투갈 상인 일본에 철포(조총) 전파

일본 규슈 최남단 도시 가고시마로 가보자. 가고시마 항구 앞에 거대한 화산섬이 위용을 선보인다. 사쿠라지마. 1911년 분화 때 용암이 대거 분출돼 육지와 연결된 이력을 지녔다. 지금도 연중 연기를 뿜어내는 사쿠라지마를 바라보며 항구에서 쾌속선을 탄다. 1시간 35분 만에 다네가시마 섬에 이른다. 항구에 내려 섬의 최남단 가도쿠라 곶[門倉岬)으로 가보자. 가도쿠라 곶은 왜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길까? 리스본 벨렝탑을 떠난 포르투갈 상선들은 인도를 거쳐 향료의 원산지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로 간다. 거기서 북으로 필리핀으로도 올라간다. 정확한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런 코스로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탄 배가 태풍에 떠밀려 다네가시마 가도쿠라 곶 해안에 표류한다. 1543년 8월 25일이다.

   
▲ 가도쿠라 곶. 일본 다네가시마. ⓒ 김문환
   
▲ 가도쿠라 곶 언덕에서 내려다본 해안. 포르투갈 상인들이 표류한 장소다. ⓒ 김문환

포르투갈 상인들이 표류한 곳에 설치한 일본 안내판은 마침 선박에 명나라(중국) 사람이 있어, 한자로 필담 대화를 나눴다고 기록한다. 선원들이 배가 무역선이라고 주장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선원들은 6개월여 다네가시마에 머문다. 이때 포르투갈 상인이 가진 철포(조총)를 다네가시마의 지배자인 도키다카가 거금을 주고 사들인다. 도키다카 부하 딸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포르투갈 상인에게 제조기술까지 전수받은 일본은 조총을 대량생산하며 1592년 임진왜란의 발판을 마련한다. 만약 포르투갈이 최신 무기인 총을 외국인에게 팔지 말라는 무역 규제를 내렸다면 일본은 조총기술을 갖거나 조선에 침략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표류해 신문물을 전했던 해안에는 현재 일본 우주센터가 들어섰다. 철포에서 첨단 우주과학의 산실로 옷을 바꿔 입은 거다.

   
▲ 철포 전래비. 다네가시마 가도쿠라 곶. ⓒ 김문환
   
▲ 일본 우주센터. 다네가시마. ⓒ 김문환

1549년 포르투갈 신부 일본에 기독교 전파

포르투갈 리스본 벨렝탑에서 제로니모 수도원으로 가보자.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석공 예술에 모두가 탄성을 자아낸다. 제로니모 수도원에서 나와 수도원 왼쪽으로 붙은 국립 고고학박물관을 지나 해양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입구에서 포르투갈을 해양대국으로 이끈 엔리케 왕자 조각을 보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림 한 점이 탐방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누구일까? 1543년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에 조총을 전해준 뒤, 고국으로 돌아가 일본의 존재를 알린다. 이에 포르투갈은 일본과 무역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동시에 기독교 전파에도 공을 들인다. 그림의 주인공은 6년 뒤 1549년 일본 가고시마에 상륙한 포르투갈의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신부다. 산타 크루즈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도중의 에피소드를 그린 건데, 이게 좀... 박물관의 그림설명을 읽어보자. 생수가 모자라 산타 크루즈호 선원들이 갈증으로 죽음 일보 직전에 몰렸다. 이에 사비에르 신부가 바닷물을 민물로 바꿔 선원을 구하는 기적을 일군다.

   
▲ 엔리케 왕자 조각. 리스본 해양박물관. ⓒ 김문환
   
▲ 산타크루즈 호와 사비에르 신부. 사비에르 신부가 바닷물을 생수로 바꾸는 기적을 일구는 그림. 리스본 해양박물관. ⓒ 김문환

천신만고 끝에 산타크루즈 호는 1549년 8월 15일 가고시마 항에 닻을 내린다. 가고시마 시내 중심가에는 당시 사비에르 신부가 최초로 지었던 교회 건물의 잔해가 남아 있으며 옆에는 현대식 기념교회가 아담한 자태로 다소곳이 서 있다. 백제를 통해 유교와 유학, 불교를 받아들인 일본은 포르투갈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거다. 사비에르 신부가 전한 기독교는 일본에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1579년 신자가 15만 명으로 늘었고, 1592년 임진왜란 당시 1군을 이끌며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1만 8,000명의 기독교 신자로 구성될 정도였다.

   
▲ 가고시마 기독교 전래지. ⓒ 김문환
   
▲ 1549년 가고시마에 도착한 사비에 신부가 세운 교회 잔해. ⓒ 김문환

도쿠가와 막부, 포르투갈과 단교 뒤 네덜란드와 교역

리스본 해양박물관으로 다시 가보자. 16~17세기 포르투갈의 해외 무역 현황을 보여주는 여러 점의 지도 가운데, 일본의 나가사키 항을 묘사한 지도가 눈길을 끈다. 나가사키 항의 ‘ㄷ’자형 육지로 둘러싸인 항구에는 2척의 범선이 정박해 있다. 범선 오른쪽을 보자. 항구 입구의 돌섬 2곳을 장애물로 연결해 막았다. 항구 폐쇄다. 내항에 정박한 2척의 범선은 꼼짝없이 갇힌 신세다. 1647년 8월 15일 벌어진 일이다. 일본이 포르투갈 범선 2척을 나가사키 항구에 강제 정박시킨 결과다. 왜 그랬을까?

   
▲ 1647년 나가사키 항에 억류된 포르투갈 범선 2척 그림. 리스본 해양박물관. ⓒ 김문환

일본은 1634년 나가사키 항에 인공섬 데지마를 착공해 1636년 완공시킨다. 그리고, 포르투갈 상인들을 이곳에만 머물도록 한다. 포르투갈 상인들의 활동 범위를 축소한 일본은 3년 뒤 1639년 돌연 100여 년 가까이 이어지던 포르투갈과 무역을 전면 중단하고, 포르투갈 선교단을 추방한다. 이어 1641년 포르투갈 인들이 떠나 텅 빈 데지마에 사세보 앞바다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상인들을 이주시킨다. 일본은 이미 네덜란드와 교역을 튼 상태였다. 1626년 인조 때 제주도에 표류한 벨테브레이, 27년 뒤 1653년 역시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은 일본으로 가던 네덜란드 상선의 네덜란드 상인이다.

일본의 무역 규제는 17세기 막부시대로 후퇴

무역을 지속하고 싶었던 포르투갈은 1547년 산 주앙, 산토 안드레 2척의 배에 사절단을 태워 일본으로 보낸다. 하지만, 일본은 8월 15일 나가사키에 들어온 포르투갈 선박을 억류시킨다. 앞서 본 리스본 해양박물관의 그림은 이때 상황을 묘사한 거다. 20일 뒤인 9월 4일 일본은 봉쇄를 풀고 포르투갈 선박 2척을 돌려보낸다. 무역 재개 요구는 불발로 끝난다. 일본은 1641년부터 네덜란드 상인에게만 데지마를 근거로 일본과 무역할 독점 지위를 부여한 터였다. 일본은 왜 포르투갈 대신 네덜란드를 선택한 것일까? 포르투갈이 기독교를 포교하려 한다는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100여 년간 자유롭게 교역하던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은 거다.

   
▲ 포르투갈 전함 모형. 16세기. 리스본 해양박물관. ⓒ 김문환

선교보다 무역에 치중한 네덜란드는 교역을 이어간다. 앞서 1650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아리타의 도자기를 처음 유럽으로 실어 갔던 것도 이런 배경이다. 일본은 1641년 이후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강제개항 당할 `때까지 213년 동안 데지마를 통해 네덜란드와 무역하며 서구문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피어난 일본의 학문을 화란(和蘭, 네덜란드)에서 ‘난(蘭)’을 따 ‘난학(蘭學)’이라 부른다. 이처럼 무역을 통한 선진문물로 성장한 일본이 경제 외적인 문제로 한국과 무역을 제한하며 경제전쟁을 일으키는 행태는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행위다. 정치적인 이유로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중단시킨 17세기 도쿠가와 막부시대로 회귀한 구태다. 일본이 상식을 회복해 정치적 이유를 버리고 호혜·평등의 자유무역 정신으로 돌아오길 기대해 본다.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김현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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