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김복동>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부동의 상태를 지키려 애썼다.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코도 훌쩍이지 않으려고 참았다. 오직 할머니 목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스크린 속 김복동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먼저 간 이순덕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객석 곳곳에서 나지막이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꾸역꾸역 삼켜지지 않는 슬픔이 어둠 속에서 새어 나왔다. 영화의 주인공을 대신해서, 영화의 공백을 메운 건 관객들이 내는 울음소리였다.

관객 ‘입소문’이 간절한 영화

▲ 영화 <김복동>의 포스터. 지난 9일 <뉴스타파>가 후원회원을 초청해 시사회를 가졌다. ⓒ 최유진

<김복동>은 여성인권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였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선생의 이야기를 담았다.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한 1992년부터 세상을 떠난 2019년까지, 김복동 선생이 일본 정부에 사죄를 받기 위해 투쟁한 기록이다.9일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에서 영화 <김복동>(감독 송원근) 시사회가 열렸다. 영화 제작사인 비영리 독립언론 <뉴스타파>가 후원회원들을 초청한 자리였다. 영화는 8일 개봉해 5일만에 누적관객 3만을 넘었다. 적은 상영관과 상영횟수에도 관객들 반응이 뜨겁다. 포털 사이트 관람객 평점 9.94점, CGV 골든 에그 지수 99%라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기록하고 있다.

“끝을 맺어야지, 내가 살아 생전에 내 힘으로써 못 나오게 되면 할 수 없지마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살아 생전에는 끝까지 내가 싸우고 갈 거야.”

14일은 국가기념일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자 ‘1400번째’ 수요집회가 열린 날이다. 매주 수요일 정오면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노란 조끼를 입은 이들 속에는 김복동 선생도 함께 있었다. 단일 주제로는 ‘세계 최장 기간 집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최근 <김복동> 단체관람과 표 나누기 운동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지난 8일 서지현 검사는 자기 페이스북을 통해 관객 100명을 모아 <김복동>을 함께 상영했다. 서 검사는 <뉴스타파>와 인터뷰에서 “제 모든 것을 걸고 미투를 했던 이유도 다른 여성들이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다”며 “가해자는 처벌받고 피해자는 보호받자는 게 김복동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거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계 인사들과 더불어 금융산업노조, 전교조, 강원영상위원회, 교육연수원, 인플루언서 협회, 강원도 원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노동조합, 이솔화장품이 단체관람을 했다. 이번 주부터 평화나비네트워크, 여성가족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해양수산부 등이 단체 관람을 이어갈 예정이다. 14일 성남시청과 금천구청도 무료 상영회를 개최한다.

<김복동>은 8월 초 극장가 극성수기에 개봉했다. 많은 마케팅 비용을 투입하는 상업영화가 아닌데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열세도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여러 사람의 자발적인 뜻이 모여 제작됐고, 관객 ‘입소문’을 통해 홍보가 이뤄지고 있다.

김복동 선생과 20년 넘게 함께 활동한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이사장, 고인을 가까이서 촬영해온 1인미디어 미디어몽구가 <뉴스타파>와 함께 기획했다. 배우 한지민이 내레이션으로, 가수 윤미래가 헌정곡 ‘꽃’ OST로 재능기부를 했다. <김복동>은 협업과 연대로 탄생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수익금은 모두 김복동 선생의 뜻을 기리는 사업과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 아카이브 구축에 사용될 예정이다.

전 세계에 ‘평화’를 외친 피해자

“저는 서울에서 온 피해자, 나이는 90세, 이름은 김복동입니다.”

김복동 선생은 1992년 제1회 정신대문제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증언 육성 파일은 영화 <김복동>에서 사상 최초로 공개됐다. 가족의 만류도 뿌리치고 자신이 일본군에 입은 강제 피해 사실을 고백했다. 이후 세계 각지에서 많은 여성의 피해 사실이 터져 나왔다. 위안부 문제는 전 세계적 인권 문제로 주목받았다.

▲ 김복동 선생은 생전 미국·유럽·일본 등 전세계를 순회하며 한일 위안부 합의의 부당함을 알렸다. ⓒ <뉴스타파>

1995년 일본 정부는 민간 모금 형태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설립했다.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2009년 김복동 선생은 부산 다대포에서 생활을 모두 접고 서울로 왔다. 이때부터 수요시위, 국내외 평화의 소녀상 건립 행사, 전세계 순회 강연 등 운동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김 선생은 전 재산 5천만원을 일본 내 고교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된 재일 조선학교에 기부하기도 했다.

“자기네들이 했다, 미안하다, 용서해주시오, 그래만 하면 우리들도 용서할 수 있다고.”

<김복동>에는 피해자들이 거부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와 2016년 재단법인 화해·치유재단의 출범 영상이 담겼다. 2018년 대장암 수술 후 1인 시위를 한 김복동 선생은 “우리가 위로금을 받으려고 이제까지 싸운 줄 아느냐”며 “위로금 천억 원을 줘도 받을 수가 없다”고 비판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과 졸속으로 합의해 10억엔과 맞바꾼 재단법인 화해·치유재단의 출범식. 절규하며 끌려 나간 대학생들과 이들 손을 어루만지던 피해자 김복동.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끝까지 외친 것은 ‘평화’였다.

김복동 선생은 손수 하얀 색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맞춰 입었다. 그는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의 ‘살아있는 증거’였다.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20명이다. 여전히 아베 정부는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는 등 위안부 역사를 지우려 하고 있다. 생전 고인은 일본에서도 주요 도시를 다니며 피해 사실을 알렸다. 현재 일본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평화를 향한 1400번째 ‘투쟁’, 영화 <김복동>을 보는 것으로 우리도 함께할 수 있다.


편집 : 황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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