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㊾ 고대의 한·일 교류

경북 고령군 대가야박물관으로 가보자. 철광석을 녹여 철을 생산하던 시설을 복원해 놓았다. 가야가 철 생산의 중심지였음을 나타낸다. 생산된 철은 납작한 덩이쇠로 만들어 유통했다.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된 덩이쇠를 보고 무대를 부산 동래구 복천박물관으로 옮겨보자. 복천동 38호 가야고분에서 출토한 유물을 복원해 놓았다. 말발굽이며 화살촉 400개를 비롯해 덩이쇠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덩이쇠는 무슨 용도일까?

▲ 부산 동래구 복천동 38호 가야고분 유물. 덩이쇠, 화살촉 400개 등의 철제품이 보인다. 복천박물관. ⓒ 김문환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나라에 철이 나는데 한(韓), 예(濊), 왜(倭)가 모두 와 사간다. 시장에서 철을 중국의 화폐처럼 쓴다. 2개군(낙랑과 대방)에도 공급한다.” 진(晉)나라 진수가 280∼289년 저술한 ‘삼국지’ 위나라편 ‘위서’의 30권째 ‘오환선비동이열전(烏丸鮮卑東夷列傳)’ 중 ‘동이’ 부분이다. 학자들은 여기서 ‘나라’를 변진(변한), 즉 가야로 본다.

철의 산지 가야가 덩이쇠를 만들어 화폐처럼 썼으며 ‘왜’ 즉 일본에도 수출했다는 기록이다. 초기 철기시대 덩이쇠는 요즘의 첨단 반도체나 그 소재와 같다. 일본이 한국에 첨단제품 수출을 규제하며 경제전쟁을 일으켰다. 자유교역과 국제분업, 평화공존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거스른다. 한반도와 대륙에서 첨단제품과 문화를 보내주고 이를 자유롭게 받아 성장하던 일본과의 관계를 유적과 유물을 통해 살펴본다.

대영박물관, 일본전시실의 백제 관음조각

대영박물관으로 가보자. 여름방학이면 ‘미어터진다’는 표현이 꼭 어울린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탐방객들로 유명열람실은 발 디딜 틈도 모자란다. 대영박물관에는 한국전시실도 운영한다. 이곳을 방문하면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소개할 주요 유물은커녕 복제품도 없다. 구석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외국인이 몇 명이나 올까? 대영박물관을 방문하는 수많은 세계인이 휑한 한국전시실을 스쳐 지나며 혹여 한국 역사와 문화를 텅 비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문화재 당국의 분발을 촉구하며 92-94번 전시실, 즉 일본전시실로 간다. 동양 문화와 역사에 관심 있는 탐방객들이 대거 이곳을 찾는다. 이들이 일본 전시실 입구에서 만나는 마스코트와 같은 유물은 무엇일까?

▲ 백제관음상. 6∼7세기. 일본 나라 호류지. 대영박물관 일본전시실의 입구에 상징처럼 세워 놓았다. 복제품. 대영박물관. ⓒ 김문환

‘Kudara Kannon’ ‘百濟觀音像(백제관음상)’이라는 한자 표기와 함께 대영박물관이 게시한 설명문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구다라(Kudara)는 한국의 고대 국가 백제를 가리키는 일본어다. 백제는 530∼700년 일본에 불교를 소개하고, 이런 스타일의 불상도 전한다. 600∼700년 만들어진 이 관음상은 일본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에 있는데 1930년 일본 조각가 니로 추노스케가 복제품을 만들어 이곳 대영박물관에 전시해 왔다.” 필자는 호류지 보물관에서 이 백제관음상 진품을 촬영금지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화재이니 슬쩍 찍어 놓았다. 하지만, 대영박물관의 복제품 사진을 쓴다.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불교 같은 선진사상은 물론 조각예술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대영박물관 설명을 통해 전하기 위해서다. 법륭사에는 백제인이 그린 벽화(한때 고구려 담징이 그린 것으로 알려짐)를 간직한 금당도 자리한다. 1400년 넘은 한국인의 벽화 예술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호류지 금당 벽화를 통해 일본 문화의 격은 한층 높아졌다. 한반도와 대륙에서 건너간 한국문화가 불교나 조각에만 그칠까?

일본에 종이와 한자, 유학을 전한 백제의 왕인

일본 오사카(大阪)로 가보자. 일본 제2의 도시라는 외형보다 일본 역사의 요람이라는 점에 더 큰 방점이 찍힌다. 오사카 시내 한복판 나니와(難波) 유적지는 7세기 일본의 궁성이 자리하던 중심부다. 오사카 근교 사카이(堺)시에는 일본의 거대 고분인 천황의 전방후원묘가 두루 분포한다. 역시 오사카 주변에 자리하는 아스카(飛鳥), 나라, 교토(京都)는 일본 역사무대의 무게추가 도쿄(東京)로 기울던 17세기 도쿠가와(德川) 막부 이전까지 일본의 심장부였다. 일본 왕의 거소 역시 1868년까지 교토였다. 일본 고대사의 중심인 오사카에서 북쪽으로 교토, 동쪽으로 나라의 딱 중간 지점에 위치한 히라가타(枚方)시로 가보자. 오사카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여 달린 뒤, 내려 표지판을 따라 30분여 걸으면 왕인공원(王仁公園)과 그 뒤로 왕인묘(王仁墓)가 나온다. 일본에서는 ‘와니’로 발음하는 왕인이 누구이길래 이름을 따 공원도 만들고 묘지까지 나름 품격있게 조성했을까?

왕인공원 앞에 일본이 세워놓은 안내판을 그대로 전하는 게 도움이 되겠다. “가까이에 오사카부의 사적으로 지정된 왕인묘가 자리한다. 왕인은 응신천황 시대(5세기 초) 조선반도(한반도) 백제로부터 건너왔다. 응신천황의 아들에게 학문을 가르쳐준 학자로서 ‘일본서기’(720년 저술된 역사책으로 ‘일본’이름이 들어간 최초의 문헌)에도 나온다. 또 ‘고사기’(712년 편찬된 일본 최초의 역사책)에는 ‘와니기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안내판을 계속 읽어보자. “‘고사기’에는 왕인이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갖고 왔는데, 학문과 함께 서물(書物·종이와 먹 등 필기도구를 가리킴)을 최초로 전했다. 우리나라(일본)의 학문과 문예의 시조로 ‘왕인박사’라고 불린다.”

일본 학문과 문예의 비조 왕인 무덤과 백제신사

▲ 일본 학문과 문예의 시조로 추앙받는 백제 출신 왕인박사 묘. 일본 히라가타. ⓒ 김문환

왕인공원에서 아담한 마을의 민가들을 지나면 왕인묘에 이른다. 오사카부지정사적 전왕인묘(王仁墓)라는 큼직한 석재 입간판 뒤로 ‘백제문’ 현판을 단 깔끔한 한옥 스타일 문이 높이 솟았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박사왕인지묘(博士王仁之墓)’라고 쓴 오래된 묘지석 아래 잔돌로 장식한 평평한 왕인의 무덤이 탐방객을 맞는다. 일본인 스스로 일본 학문의 비조요, 일본 문예의 비조라고 표현하는 백제사람, 아니 한국 사람 왕인의 묘다. 왕인 묘 앞으로 석탑이 서 있다. 석탑의 4면에 새겨진 글자를 보자. ‘천자문’ ‘논어’. 천자문이나 논어를 지금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1500여 년 전 천자문은 백제나 일본에서 유일한 문자다. 논어는 지금의 다양한 학문 가운데 하나인 유학의 한 갈래가 아니다. 학문 그 자체다. 앞서 대영박물관 설명에서 살펴보았듯이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백제인이 일본에 전해준 것이 530년 이후니 그보다 100여 년 앞선 5세기 초 왕인이 일본으로 가 논어를 전할 때는 일본의 표현처럼 최초의 학문이 된다. 일본은 백제인 덕에 비로소 문자를 깨우치고 제지법을 배워 학문을 익히며, 불교를 받아들여 사상의 다양화를 통해 문화를 꽃피운다. 왕인 무덤 앞에는 1999년 이곳을 참배한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 2008년 이곳을 찾은 영암군수가 심은 나무가 자란다. 

왕인묘에서 히라가타시 서부를 흐르는 요도(淀) 강가로 멀지 않은 거리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유적지가 기다린다. 도로 옆 언덕바지에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가 해 질 녘 탐방객을 맞는다. 일본말로는 ‘구다라오 신사’지만, ‘百濟王’이라는 한자어가 유난히 친근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왕실 후예를 기린 것은 아닐까…. 백제인이 세웠거나 백제 왕실을 기려 만든 것임은 불문가지다. 일본 문화발전에 백제인만 기여했을까?

산둥반도 적산법화원 장보고와 일본 승려 엔닌

무대를 대륙의 산둥(山東)반도로 옮겨보자. 한국과 가장 가깝게 서해로 툭 삐져나온 웨이하이(威海)에서 무역항 스다오(石島)로 가는 길에 위치한 룽청(榮城)시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 차에서 내려 큼직한 진입문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안쪽으로 사찰건물이 나온다. 그리고 건물에서 다시 뒤로 돌면 탁 트인 서해와 스다오항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서 바다를 응시하며 앉은 거대한 인물상과 마주한다. 뭐든지 크게 만드는 중국답게 한국서 보기 힘든 이 거대한 청동 조각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장보고다.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당나라로 건너온 장보고는 당나라 군인으로 활약한 뒤,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이곳에 법화원을 세워 신라인을 보호한다. 이를 기념해 중국이 복원한 법화원은 신라 말기 국제교류와 교역이 활발했음을 증언한다. 

발길을 전남 완도로 돌린다. 말끔히 복원된 청해진이 반겨준다. 장보고는 832년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의 지원 아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당나라, 신라, 일본을 잇는 무역로 보호와 교역 활성화에 헌신한다. 이미 산둥반도에 설치해둔 적산법화원과 청해진을 연계 운영하며 장보고는 동아시아 물류의 중심에 선다. 여기서 일본의 승려 엔닌(円仁)과의 관계를 들여다보자. 엔닌은 838년 일본 천황의 명을 받아 당나라에 온다. 적산법화원의 도움으로 중국 불교의 주요 성지 가운데 하나인 오대산 순례는 물론 수도 장안에서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불경도 필사한다. 귀국할 때도 적산 법화원과 신라인의 도움을 얻어 847년 일본 하카다(博多)항으로 돌아간다. 9년 동안의 순례를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당시 당나라에서 활약하던 신라인은 물론 장보고의 활동상을 소상하게 기록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다. 일본 최초로 대사 칭호를 받은 엔닌은 신라인과 장보고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않았고, 엔닌의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기려 888년 일본에 적산선원을 세운다. 장보고가 일본 승려에게 은혜를 베풀며 지켰던 동북아 해상 무역로는 고려시대 신안 해저유물선으로 입증된다.

신안 해저유물선으로 보는 동북아 자유무역

▲ 일본 선주 이름과 물품 내역이 적힌 목간. 1321년. 신안 해저유물선 출토 유물. 국립중앙박물관. ⓒ 김문환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던 대원제국 시기 1323년 6월 중국 항저우(杭州)만의 무역항 칭위안(慶元·영파)을 출발한 길이 28.4m, 너비 6.6m의 중국 무역선이 엔닌이 귀국했던 하카타로 가던 중 장보고의 청해진이 설치됐던 완도 옆 신안 앞바다에 침몰한다. 650여 년이 흐른 1976년부터 1984년까지 11차례 인양을 통해 다시 햇빛을 본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2만2000여 점의 신안 해저유물 가운데 목간들이 눈에 들어온다. 일본 화주 이름과 물품 내역을 적은 목간은 14세기 동아시아 자유무역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전시유물은 중국 도자기, 향료, 동전, 구리거울 등인데, 고려청자도 7점 포함돼 고려 역시 무역 루트에 포함돼 있음을 말해준다. 일본은 이렇게 한반도와 오랜 기간 무역과 교류를 통해 발전해 왔다. 조선시대 대마도(對馬島)에 제공했던 쌀이나 통신사가 전한 문물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고마운 한국에 1910년 경술국치 침략의 배은망덕으로 답하더니 21세기에도 경제 도발을 감행했다. 한·일 평화 선린 교류를 다시 생각해 볼 때다. (문화일보 2019년 7월 16일자 22면 34 회 참조)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황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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