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북촌방향>

 ▲ 홍상수 감독의 전작 영화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밤과 낮> <해변의 여인> <생활의 발견> <극장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 영화 장면 갈무리

"어쩌면 이렇게 예뻐요?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당신이 정말 내 짝이었으면 좋겠다.” 면전에 대고 이런 낯간지러운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던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구경남(김태우 역)도.

대마초를 피우다 들켜 도망간 파리에서 만난 옛 애인과 여인들, 한국에 두고 온 아내에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랑해”를 연발하며, 서울의 밤과 파리의 낮을 잇는 이중생활을 하던 <밤과 낮>의 김성남(김영호)도. 

첫눈에 반한 후배의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뒤 행여 그녀에게 발목 잡힐까 이리저리 내빼던 와중에도, 우연히 본 여행객에게 또 호감을 느끼는 <해변의 여인>의 김중래(김승우)도.

두 사람의 동일한 첫사랑 선화를 7년 만에 찾아가 서로 마음을 얻으려 아옹다옹하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김헌준(김태우)과 이문호(유지태)도. 

술에 취해 부축 받던 연실이 “이렇게 막 안아도 돼요”라고 반문하자, “네, 그럴게요”라며 더 능청을 떨며 몸을 더듬던 <극장전>의 김동수(김상경), 고기집에서 연인과 시비가 붙어 온갖 치졸한 모습은 다 보여준 <생활의 발견>의 경수(김상경)도. 

누구 하나 우열을 가리기 힘든 홍상수의 ‘찌질’한 남자들이다. 2009년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이어 이듬해 <하하하>에서 김상경과 함께 주연을 맡으며 홍상수의 떠오르는 페르소나로 주목받은 유준상이, 홍 감독의 신작 속에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찌질’하게 돌아왔다. 지난 8일 개봉한 <북촌방향>이 그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치졸한지 “내가 아는데...”

 ▲ 영화 <북촌방향> 포스터.
<북촌방향>은 한때 영화감독이다가 지금은 지방대 교수인 성준(유준상)이 잠깐 서울에 올라와 인사동 북촌마을에서 보낸 시간을 담은 영화다. 그의 영화는 대개 보편의 일상을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 항상 많은 판단의 여지가 있다. 홍 감독의 영화를 본 관객은 각자 서로 다른 삶을 목격하게 되는데 <북촌방향>을 두고도 할 말이 많다. 우선 앞에서 한참 늘어놓은 ‘찌질남’ 이야기부터 이어 가보자. 

두꺼운 겨울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북촌 길을 내려오는 성준을 향해 카메라가 미끄러지듯 급하게 클로즈업한다.

“어떤 새끼도 안 만나. 서울을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통과해 가겠어. 그리고 집으로 슝슝!”

영화 <북촌마을>의 첫 장면, 첫 대사이자 서울에 막 도착한 성준의 다짐이다. 선배 영호(김상중)만 보고 바로 내려가리라 마음먹지만 의도하지 않은 만남들이 그를 찾아오면서, 북촌에서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는 어느 영화감독의 궁색한 일상이 시작된다.

늘 그렇듯, 홍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이자 <오! 수정>에 이은 두 번째 흑백영화 <북촌방향>에도, 술에 취해 치근거리는 ‘찌질’한 욕망과 이를 미워할 수 없는 허세를 가진 남자가 있다. 성준은 선배를 기다리며 북촌마을을 맴도는 사이 알고 지내던 여배우를 만나고, 안면 없는 한 무리 영화학도들 술자리에 동석하고, 옛 애인 경진(김보경)의 집을 찾는다.

선배는 아끼는 후배 여교수(송선미)를 성준에게 소개해주지만, 성준은 세 사람이 함께 들어간 술집 ‘소설’에서 옛 애인과 닮은 여주인 예전(김보경 1인 2역)을 보고 설렌다. 밤이 흐르고 다시 ‘소설’에 모이고, 또 모이고. 시간이 흐르긴 하지만 그것이 하루하루가 가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모호한 시간과 만남이 반복된다. 북촌에 눈 내리던 어느 날 예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는 길 위에서도 과거에 알았던 사람, 이젠 기억나지 않는 사람, 낯선 사람들과 계속 마주친다.

 

 ▲ 성준의 애초 다짐과 달리, 계획에도 없던 만남들이 계속된다.

애초 다짐과 달리 숱한 만남이 이어진 <북촌방향>에서 성준은 감정의 치졸함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3년 만에 경진을 찾아갔다 떠날 때도, 그녀를 닮은 예전의 술집에서 밤을 보내고 ‘소설’을 나설 때도 성준은 ‘찌질’함의 정수를 보여준다. 일단 고백부터 하고 따라붙는 남자마냥 무턱대고 들이닥치고선, 애정의 감정 한 자락을 펼치기도 전에 떠나는 ‘일회용 만남’이면서 거기에 온갖 거창한 말들은 다 갖다 붙인다.

“내가 아는데, 오늘 이후로 우린 안 보는 게 나아.”
“내가 아는데, 연락하면 너도 너지만 내가 너무 힘들어. 아까 말했지? 좋은 사람 만나야 돼. 술 먹어도 술 취하지 말고, 세 네 줄이라도 일기는 매일매일 쓰고. 이 세 가지는 꼭 지켜.”

속물스런 욕망과 그 뒤에 남긴 비루한 말들. 삼겹살, 소주잔과 함께 홍 감독 영화에는 ‘찌질남’이 항상 등장하는 이유가 뭘까? 서사에 작은 변주만 있을 뿐 등장인물이 죄다 ‘찌질’한 줄 알면서도, 홍 감독의 ‘같은’ 영화들을 계속 보는 이유는 뭘까. 남녀 불문 치졸한 감정과 ‘찌질’한 짓은 남 얘기가 아니다.   
 
기억상실과 맥락 없는 대화...그건 우리의 인생

동일성이 모호한 시간처럼 세밀한 서사 역시 선형적으로 흐르거나 연결되지 않는다. 선배 이외의 다른 만남은 계획하지 않고 상경한 성준에게 약속되지 않은 만남들이 이어진 것처럼, 북촌에 고인 이야기 다발이 인과관계 대신 우연이란 고리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영화의 일부를 선후관계 없이 하나의 큰 이야기 줄기들로 보면, 그 안에는 성준이 계량할 수 없는 시간 동안 북촌에 머물렀다는 큰 서사만 남는다. 우연의 연속이자, 시간이 흐를수록 세부적인 사항은 끊임없이 상실되고 큰 덩어리만 남는 우리 인생의 기억처럼 말이다. 흔히 인생을 소설에 비유하는데, <북촌방향> 속 시간이 소용돌이치는 장소가 ‘소설’이라는 이름의 술집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 주인공들은 술집 '소설'에서 반복해서 만난다.

<북촌방향>은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술자리 수다를 통해 시간의 다발을 풀어낸다. 하지만 영화가 시간의 흐름대로 나아가지 않듯이, 수다 역시 이야기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북촌방향> 속 너저분한 수다들이 맥락 없는 대화의 연속 같아 보이는 이유도 인물 각각이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감정을 중심으로 서로 주고받은 말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쏟아낸 수다는 하나의 화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쏟아져 나온 감정이 충돌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맥락 없이 흐르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감정의 맥락들이 서로 맞부딪치는 과정의 연속인 것처럼.

출구가 없는 이야기를 단출하게 구성했지만, 그 곳곳에 곱씹을 만한 장치들을 숨겨놓는 <북촌방향>은 할 말은 많지만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하긴 힘들다. 우연 같은 순간들로 가득한 화면들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면, ‘찌질’함 투성이에 불가항력 덩어리인 우리 인생을 설명할 준비부터 해야 할 게다. 

행위는 무수한데 뜻은 모호한 영화 <북촌방향>을 보려면 익숙한 서사에 무뎌진 정서의 날을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 마지막 장면의 성준처럼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영화관을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배우 고현정이 성준의 영화를 좋아하는 일반인 팬으로 잠깐 출연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데 어찌할 줄 모르는 성준의 표정이 묘하다.

영화 <북촌방향>의 영어 제목은 <The day he arrives>.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한눈에 조감되지는 않는 <북촌방향>을 ‘그가 도착한 날’에 한번 거닐어보시길.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