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㊻ 한글과 알파벳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비운

한글이 최근 우리사회 화두로 떠올랐다. 계기는 경상북도 ‘상주’와 영화 ‘나랏말싸미’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 하며 전국을 8도로 나눌 때 상주를 경상도의 중심에 뒀다. 상주목사가 경상감영을 책임지도록 한 거다. 경상남북도를 합친 ‘경상도’가 ‘경주’와 ‘상주’에서 한 글자씩 따온 말이라는 사실에 상주의 위상이 묻어난다. 200여 년 경상도의 중심이던 상주는 임진왜란 중 그 지위를 잃는다. 부산에서 상주를 거쳐 충주와 한양으로 가는 조선의 주요 교통로와 거점이 왜군 손에 파괴된 탓이다. 1601년부터 경상감영의 지위를 대구가 물려받아 오늘에 이른다.

지난 일요일 진도 3.9의 지진피해까지 겪은 상주의 배모씨가 훈민정음 해례본을 갖고 있다고 해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라 불린다. 최근 대법원 판결로 상주본은 국가 소유로 결론났다. 하지만, 소유주인 국가의 안일하면서도 무기력한 행정력과 국가문화재를 불법 점유하고 있는 배모씨의 배짱을 보면 뭔가 한참 뒤바뀐 모습이다. 도둑이 매를 들고 공권력이 절절 매는 격이라고 할까? 국민은 속이 터진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말씀하실지 궁금할 것도 없이 자명하다.

▲ 세종 동상. 여주 영릉 ⓒ 김문환

영화 ‘나랏말싸미’, 세종의 한글창제 역정

답답한 마음인지 때맞춰 세종대왕이 직접 국민 곁으로 다가오셨다. 효과만점의 이데올로기 전달수단 영화를 통해서다. 중국의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에서도 민족 주체성을 살린 용단으로 백성을 위한 실용정책 차원에서 추진된 한글 창제. 그 위험하면서도 위대한 여정을 조철현 감독이 영상에 담아냈다. 일본의 경제도발이 도를 더해가는 시점에 24일부터 전국 개봉관에서 국민과 만난다. 영화는 중국문화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당시 지배층 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쓴 세종과 그 배후인물의 콜라보, 즉 찰떡궁합을 그려낸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전면에 등장하기 어려운 불교 스님, 신미대사와 세종. 산스크리트 문자, 티벳 문자, 파스파 문자를 깨우친 신미대사가 세종에게 한글 창제의 영감을 안겼다는 게 스토리텔링의 골자다.

한글창제의 독창성과 세종,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터라 “웬 스님? 웬 산스크리트 문자나 파스파 문자?“하고 놀랄 법도 하다. 신미대사는 영산김씨 족보에 따르면 속명이 김수성이다. 유학자인 동시에 스님으로 동생 김수온이 집현적 학사였던 학자집안이다. 한글 창제당시 조선초기로 역사의 시계를 돌려 3가지를 탐구해 보자. 1. 어떤 이유로 한글을 창제했는지, 2. 어떤 방법으로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들었는지, 3. 한글 창제에 외국 문자의 영향이 있었는지 여부다.

한글 창제 목적 ‘예의’, 창제 방법 ‘해례’에 기록

"국어가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일반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자가 많은 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쓰는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國之語音 異乎中國與文字 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위민과 실용정신이 절절히 묻어나는 한글 창제 동기다. 『세종실록』과 『월인석보』에 세종이 직접 말했다고 적혀 있는 이 창제목적 부분을 ‘훈민정음 예의’라고 부른다.

이런 좋은 뜻을 갖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알 길은 없을까? 있다. 훈민정음, 즉 28자의 한글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를 어떤 원리로 만들었는지 밝힌 내용을 ‘훈민정음 해례’라고 한다. 일제시대 간송 전형필이 입수해 서울 간송 미술관에 보관중인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이 주인공이다. 상주본은 이 간송본과 같은 시기 인쇄됐지만, 내용은 더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 가치가 그만큼 더 크다는 얘기다.

한글창제 시 ‘알파벳 개념’, 전파? 혹은 자생적?

해례본에 따르면 한글 자모 창제원리는 이렇다. 먼저, 자음의 경우 발음기관인 입술과 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사물의 모양을 본뜬 것이므로 ‘상형설’이라고 흔히 말한다. 모음은 우주를 상징하는 천지인(天地人), 즉 하늘, 사람, 땅을 나타내는 3개의 기호를 먼저 만든 뒤, 여기에 획을 더하는 방식으로 창제했다. 우주를 담은 철학적 기초 위에 획을 더한 ‘가획설’이라 부른다. 당사자들이 제작 동기와 제작 방법(상형설+ 가획설)을 설명해 놓았으니 이보다 더 정확한 고증은 없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의 여지가 생긴다. 흔히, 한글 자모의 형태가 독창적이라는 부분만 강조할 뿐, 자칫 한글도 알파벳의 하나라는 점은 잊고 지나친다는 점이다.

알파벳은 영어를 적는 문자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소리의 기본단위인 음소, 즉 자음이든 모음이든 특정 부호를 조합해 모든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를 알파벳이라고 규정한다. 글자마다 뜻을 가진 중국의 한자를 제외하면 현존하는 지구촌 대부분의 문자는 알파벳이다. 우리는 고유의 말을 갖고 있으면서도 고구려 이후 1000년 넘는 세월동안 한자를 써왔다. 그러다 세종 때 부호를 조합해 소리 나는 대로 적는 알파벳의 개념을 적용해 한글을 만든 거다. 이 알파벳의 개념마저 독창적으로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한글 창제 이전 이미 수천 년 동안 써온 인류 알파벳 발달사의 한 과정에 편입돼 영향을 받은 것인지. 이 대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부족하다.

▲ 양주 회암사지. ⓒ 김문환
▲ 회암사지 출토 산스크리트 문자 기와들. 회암사지 박물관 ⓒ 김문환
▲ 회암사지 출토 산스크리트 문자 기와. 회암사지 박물관 ⓒ 김문환
▲ 효령대군 명문과 함께 적힌 산스크리트 문자 기와. 국립 중앙박물관 ⓒ 김문환
▲ 산스크리트 문자 기와. 인천 시립박물관 ⓒ 김문환

양주 회암사지 박물관 산스크리트 문자 기와

무대를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지로 옮겨보자. 지금은 건물 주춧돌만 남은 폐사지이지만, 고려시대 후기 최대 규모 사찰이자 유교국가 조선에서도 왕실 사찰로 번성하던 절이다.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은 동방에서 가장 큰 절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에 이어 두 번째 왕위 계승대상이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동생 세종이 왕이 되면서 승려로 변신해 도를 닦던 절이 회암사다. 천마산의 빼어난 기암절벽 산세를 배경으로 드넓게 펼쳐진 폐사지 앞에 절터에서 찾아낸 각종 유물을 모아 전시관을 차렸다. 이 전시관을 빛내주는 화려한 색상의 도자기 기와 유물 사이로 마치 부호 같은 도안이 새겨진 기와들이 탐방객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무슨 기와일까?

산스크리트 문자를 새긴 기와다. 세종의 형인 승려 효령대군이 거처하던 절에 산스크리트 문자를 적은 기와가 많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적어도 세종의 친형은 산스크리트 문자를 비록 해독하지는 못해도 존재 자체를 알았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여기만이 아니다. 인천 시립박물관으로 가도 산스크리트 문자 기와를 전시중이다. 회암사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의 사찰이 산스크리트 문자 기와를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 인도출신 지공 화상 부도. ⓒ 김문환

성현 ‘용재총화’, “한글은 산스크리트 문자 참고”

조선 초기 문신 성현은 1499년-1504년 사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 “훈민정음을 산스크리트 문자를 참고해 만들었다”고 적는다. 영화 ‘나랏말싸미’가 역사 기록을 근거로 제작됐음을 보여준다. 산스크리트 문자란 무엇인가? B.C16세기경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에서 인도 북부지방으로 이주해온 인도유럽어족 계열 백인들이 B.C 7세기경부터 쓰는 문자를 가리킨다. 이들의 언어 산스크리트어를 적는 문자다. 자음을 합쳐 소리 나는 대로 말을 적는 알파벳이다. 부처님이 열반한 뒤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만든 불교의 경전은 바로 이 산스크리트 문자로 적혔다. 한자로는 산스크리트어를 범어(梵語), 산스크리트 문자를 범자(梵字)로 부른다.

범자 불경을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했고, 우리는 이를 들여다 읽었다. 그러나, 불경을 원전으로 읽고자 하는 학승들은 당연히 산스크리트 문자를 해독할 줄 알아야 했다. 회암사지 뒤편 천마산 자락으로 조금 올라가면 3개의 부도가 나온다. 맨 밑에 세종의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스승 무학대사 부도가 놓였다. 그 위는 무학대사의 스승 나옹선사 부도다. 그 위에는? 나옹의 스승인 지공 선사 부도다. 지공 선사는 인도출신으로 몽골의 대원제국을 거쳐 고려로 들어와 회암사에 머물렀다. 일설에는 회암사를 창건했다고도 한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산스크리트 문자의 계보가 이어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는 인물 구도다.

▲ 티벳문자. 고려시대 국내 사찰에 유입. 국립중앙박물관 ⓒ 김문환

고려 원종이 항복하러 간 내몽골 상도, 파스파 문자

이번에는 무대를 중국으로 옮겨보자. 북경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7시간 가까이 달리면 내몽골 자치구 다론(多伦)에 이른다. 여기서 버스를 내려 택시로 갈아타고 정란치(正蓝旗) 방향으로 가다 보면 30여분 지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상도(上都) 유적지가 나온다. 몽골어로 자나두(Xanadu). 70-80년대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호주 출신의 팝가수 올리비아 뉴튼존이 1980년 발표한 경쾌한 리듬의 ‘재나두(Xanadu)'가 바로 이 상도다.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다녀간 뒤, ’동방견문록‘에 이상향으로 그린 황금의 도시다. 이 상도를 찾아온 고려 임금이 있다. 몽골에 항전하던 최씨 무신정권 아래 고려 고종이 항복을 결정하고, 그 아들인 세자를 이곳에 보낸다. 1259년이다. 세자는 이듬해 아버지 고종이 죽으면서 원종으로 즉위한다. 원종이 만나 항복을 알린 몽골제국 지도자는 징기스칸의 손자이던 쿠빌라이다. 쿠빌라이는 고려의 항복을 받으면서 동시에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원종과 사돈을 맺는다. 원종의 아들이자 훗날의 충렬왕에게 딸을 시집보낸다.

충렬왕의 장인 쿠빌라이는 이후 티벳을 정복하고 1265년 티벳 승려 파스파에게 몽골제국의 문자를 만들라고 명한다. 할아버지 징기스칸이 위구르인에게 명해 만든 몽골 문자가 있었지만, 제국을 통치하는 언어로 부족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파스파는 고국 티벳의 문자를 떠올렸다. 티벳은 불교와 함께 받아들인 산스크리트 문자를 변형시켜 티벳 문자를 만들어 쓰던 터였다. 파스파는 이 티벳 문자를 다시 변형해 1269년 파스파 문자를 완성해 바쳤다.

▲ 내몽골 상도 유적지. ⓒ 김문환
▲ 파스파 초상화. 상도유지 박물관. ⓒ 김문환
▲ 파스파 문자 통행증명서. 상도유지 박물관 ⓒ 김문환

이익 성호사설 “한글은 파스파 문자 참고”

쿠빌라이는 수도 카라코룸을 근거로 대칸 경쟁을 벌이던 친동생 아리크부가를 물리치고 대원제국을 세운 뒤, 대칸의 지위에 올랐다. 이어 파스파 문자를 대원제국의 공식 문자로 삼았다. 동쪽 고려부터 서쪽 킵차크 한국의 우크라이나, 남쪽 일한국의 이란까지 유라시아 대륙 각지의 대원제국 속국은 물론 기타 지역의 외국으로 보내는 제국 문서는 파스파문자로 쓰였다. 상도 박물관은 물론 내몽골과 몽골, 중앙아시아 각지에 파스파 문자 문서와 파스파 문자로 된 통행증명패(일종의 마패)가 유물로 남아 몽골과 파스파 문자의 역사를 전한다.

충렬왕 이후 고려 왕세자는 어려서부터 대원제국의 수도 북경에서 자랐고, 몽골 여인과 결혼했다. 머리도 몽골식이었고, 몽골말을 썼다. 당연히 파스파문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문서를 처리하는 고려의 관리들은 물론 불교가 국교이던 고려의 일부 승려들도 마찬가지다. 산스크리트 문자-티벳 문자-파스파 문자 계보가 고려에도 그대로 전달된 거다. 세 문자 모두 자음 혹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소리 나는 대로 적는 알파벳이다. 뛰어난 실학자 이익의 사상을 그의 말년인 1740년 경 후손들이 집대성한 ‘성호사설(星湖僿說)’에 “한글이 파스파 문자를 참고했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파스파문자의 기원인 산스크리트 문자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 위로부터 산스크리트 문자, 티벳문자, 몽골 문자가 같이 새겨진 비석. 몽골 카라코룸 박물관 ⓒ 김문환

인류 최초 전용 알파벳 우가리트 문자, 쐐기문자 차용

지금은 내란으로 접근이 어려운 시리아로 발길을 돌려본다. 2000년 여름 탐방했던 시리아는 70년대 한국시골도시나 농촌을 연상시켰다. 한적하고 평화로우며 일견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내륙은 사막이지만, 지중해 연안으로는 비옥하고 기후와 인심도 좋았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시기부터 인류사를 수놓는 찬란한 역사유적도 여럿이다. 택시를 대절해 시골구석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다 무더위에 지칠 무렵, 농가에 들러 물을 얻어 마시며 갈증을 풀던 기억이 새롭다. 정겨운 인심의 시리아 국민이 독재자와 강대국의 잇속에 신음하며 각지로 떠도는 현실에 정의의 신은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신의 도시라 불리던 터키의 기독교 도시 안타키아(안티옥)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의 시리아 지중해 연안 도시 우가리트로 가보자. 현재 아랍어로 ‘라스 샴라’로 불리는 우가리트는 페니키아인이 일군 B.C14세기 유적지다. 우가리트 왕궁 유적지에서 많은 점토판 문서가 출토됐다. 이중 눈길을 끄는 유물은 우가리트 문자 점토판이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중인 이 점토판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발음의 기본단위 음소를 부호로 만든 뒤 이를 결합해 소리 나는 대로 적는 인류역사 최초의 알파벳이다. 30개의 음소로 이뤄진 우가리트 알파벳은 그러나, 독창적인 모델이 아니다.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에서 형태를 빌려왔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한 독창적인 형태의 알파벳이 등장하는데...

▲ 쐐기문자의 형태를 빌린 우가리트 알파벳 점토판. 루브르 박물관 ⓒ 김문환
▲ 시리아 우가리트 왕궁 유적. ⓒ 김문환

인류 최초 독창적 형태 알파벳, 페니키아 문자

우가리트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자. 국경을 넘어 레바논이다. 레바논은 다른 중동국가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존하고,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동시에 쓴다. 머리에 히잡을 쓴 여성을 거리에서 거의 만나기 어렵다. 수영하는 해안에서 저 멀리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눈이 수북이 쌓였다. 작지만 다양한 면모의 나라 레바논은 티레, 비블로스 같은 고대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의 터전이었다. 페니키아는 단일국가가 아니라 그리스처럼 다양한 도시국가로 나뉘었다. 수도 베이루트 국립박물관으로 가서 석관 하나를 살펴보자. 박물관 1층 왼쪽 구석에 모셔진 높이 1.4m, 길이 2.97m 짜리 석회암 관은 일견 투박하다. 대리석 석관처럼 매끄럽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어느 대리석 석관보다 빛난다.

석관 뚜껑에 "구블라(비블로스)왕 이토발이 아버지 아히람을 위해 석관을 만들었다"는 취지의 170 음소(부호), 38개 단어로 쓰인 글이 보인다. B.C 1000년 경 제작된 이 석관 뚜껑 문자는 가장 오래된 독창적 형태의 알파벳이다. B.C12-B.C11세기경 해양민족 페니키아인이 만든 페니키아 문자다. 22개 자음으로 이뤄졌다.

▲ 아히람왕 석관. ⓒ 김문환
▲ 아히람왕 석관 뚜껑에 새겨진 페니키아 문자. B.C10세기. 베이루트 국립박물관 ⓒ 김문환
▲ 페니키아 문자 비석. 레바논 비블로스 박물관 ⓒ 김문환
▲ 아람문자. 루브르 박물관 ⓒ 김문환

한글 제외 모든 알파벳, 페니키아 문자의 형태 바꾼 것

22개의 간단한 부호만 익히면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획기적인 알파벳은 급속도로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페니키아 지방 그러니까 레바논을 기준으로 서쪽 그리스로 B.C9세기 경 전파돼 그리스 문자가 탄생한다. B.C8세기 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같은 완성된 형태의 그리스문자 서사시가 인류 문학사의 서막을 올린다. 그리스 문자는 이탈리아 반도의 에트루리아 문자를 거쳐 로마의 라틴문자로 B.C6세기 진화했다. 이 라틴문자가 오늘날 영어, 프랑스어, 독어를 비롯해 서양 모든 언어를 담는 문자다. 그리스 문자는 11세기 러시아 문자로 진화한다. 페니키아 문자는 레바논에서 동쪽으로도 전파되는데, B.C8세기 시리아 땅에서 사용하던 아람어의 문자가 된다. 아람문자다. 1세기 이스라엘의 예수님이 쓰던 언어와 문자는 아람어와 아람문자다. 당시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보다 중동지역 국제어, 즉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이던 아람어를 더 많이 썼다. 아람문자는 이후 히브리 문자, 페트라의 나바티아 문자,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문자로 진화한다. 우리 눈에 그림처럼 보이는 아랍문자는 페니키아 문자에서 나온 알파벳이다.

아람문자는 시리아 문자-카로슈티 문자-소그드 문자를 거쳐 몽골초원에서 돌궐 문자-위구르 문자-징기스칸의 몽골 문자로 발전한다. 아람문자는 또 산스크리트 문자로 진화돼 티벳 문자-파스파 문자로 형태를 바꾼다. 앞서 살펴본 대로다. 중국 자금성 전각의 명패마다 보는 한자 병기 만주 문자도 티벳 문자에서 나온 알파벳이다. 크메르 문자-타이 문자-자바 문자도 산스크리트 문자에서 나왔다. 결국 지금 사용되는 지구촌 모든 알파벳은 페니키아 문자의 후예다. 우리 한글을 제외하고 말이다.

▲ 소그드 문자. 우즈베키스탄 타쉬겐트 박물관 ⓒ 김문환
▲ 카로슈티 문자. 2세기 한나라 때 중국에 온 서역인들이 사용. 낙양 출토. 북경 국가박물관 ⓒ 김문환
▲ 한자와 병행 표기한 자금성 만주문자 표기. ⓒ 김문환

고려에도 알려진 알파벳 개념과 독창적 형태의 한글

17세기 만들어진 만주 문자가 지금 사라졌으니 지구촌 알파벳 중 한글은 맨 나중에 태어난 인류 알파벳 발달사의 최신 버전인 셈이다. 그러니 가장 과학적이어야 자연스럽다. 이제 글을 정리해 보자. 뜻글자인 한자와 달리 부호를 연결해 소리 나는 대로 모든 것을 적을 수 있다는 알파벳의 기본 원리는 이미 3000년 전에 발명됐다. 이후 2000년도 더 지나 13세기 말 고려 에도 알파벳이 들어왔다. 산스크리트 문자나 파스파 문자를 통해서다. 영화 ‘나랏말싸미’에 나오는 불교계의 신미대사처럼 산스크리트 문자나 파스파 문자 같은 알파벳의 개념을 이해하는 지식인들이 고려말은 물론 한글 창제 당시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페니키아 문자 이후 형태만 바꾼 다른 알파벳과 달리 독창적 형태의 과학적 문자인 한글의 우수성을 아는 것은 한국인의 기본이다. 동시에 페니키아 문자 이후 알파벳이라는 개념이 지구촌 전역으로 전파되면서 조선사회까지 들어왔다는 배경을 아는 것도 필요하다.


편집 : 강도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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