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영화 ‘파밍보이즈’ 미학 범주 분석

영화 ‘파밍보이즈’에는 농부가 꿈인 세 청년이 나온다. 이들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농업 공동체를 견학한 뒤, 세계의 농장을 보고 싶다는 꿈을 꾼다. 6개월간 호주에서 ‘쓰리잡’을 뛰고 1500만원을 손에 쥔 뒤, 본격적인 농업세계일주를 시작한다. 2년간 셋의 세계여행경비로는 적지만, 우프(WWOOF)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농사일을 배우는 동시에 여행까지 할 수 있다. 영화는 호주와 유럽 5개국의 유기농농장과 농업공동체, 농업교육기관을 방문하는 세 청년의 여정을 보여준다.

한국 청년 현실에서 출발한 여행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한 이 영화는 관객에게 다양한 미적 체험을 제공한다. 국문학자 조동일은 고전문학 속 삶의 방식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네 종류로 나눈다. 숭고미, 비장미, 골계미, 우아미가 그것이다. 작품 속 인물은 ‘있는 존재’(주체)에서 ‘있어야 할 존재’(객체)를 지향한다. 객체는 어떤 규범이나 가치 나아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주체와 객체가 조화로운 관계일 때, 객체가 주체를 압도하면 숭고미, 객체와 주체가 대등하면 우아미를 독자는 체험한다. 객체와 주체가 갈등관계이면서 타락한 객체가 주체를 압도해 주체의 꿈이 좌절될 때 독자는 비장미를 느낀다. 골계미는 주체가 현실적으로 약자이지만 정신적으로 타락한 객체보다 위에서 조롱하고 풍자할 때 체험하는 미적 범주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 국문학자 조동일이 제시한 한국문학의 미적 범주. © 정소희

‘요즘 청년’의 화법과 패기가 매력인 영화에, 고전문학을 기준으로 세운 미적 범주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까?

이들이 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농부들을 만나 농사를 배우는 것, 더 넓은 세상을 탐구하는 것, 자연과 가까이 살아보는 것이다. 이 목표들은 ‘꿈’이라는 이름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청년들은 꿈을 통해 기아, 농촌 고령화, 생태계 회복 같은 사회적 의제도 해결하고 싶어 한다. 주체인 청년들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여행을 선택했다. 이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적 의제는 거대하다. 꿈과 만나기 위해 긴 시간 일하기와 걷기를 반복하는 주인공을 보면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낭만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는 숭고함을 느낀다.

네 가지 미적 범주를 체험하게 하는 영화

영화 첫머리에는 골계미가 드러난다. 골계미는 네 미적 범주 중 유일하게 주체가 객체보다 힘이 세다. 주체와 객체는 갈등 관계를 빚지만, 주체가 객체에 도전하며 비판하고 풍자한다. 황해도 봉산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봉산탈춤’에는 양반을 조롱하는 말뚝이가 나온다. 양반의 쓸모 없음을 언어유희로 지적하는 말뚝이에 양반은 반발하지만, 현란한 말뚝이의 말솜씨에 넘어간다. 골계미는 해학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으로, 주체가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때 가능하다.

▲ 영화 초반부 공무원과 대기업에 몰려들면서 농업을 외면하는 한국의 청년 현실을 갈매기 떼에 비유한다. © 영화 <파밍보이즈> 갈무리

하루 일이 끝난 주인공들이 공원에서 쉬며 주변으로 모여든 갈매기에게 먹이를 준다. 과자를 던지자 갈매기 떼가 몰려드는데, 여기서 청년들은 공무원, 대기업과 공기업 자리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현실’을 본다. 먹이를 두고 다투는 갈매기 떼와 적은 수의 ‘좋은’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한국 청년들이 닮았다는 것이다.

청년 중 한 명이 ‘농업 경쟁력을 보여주겠다’며 열쇠 꾸러미를 던진다. 전과 달리, 갈매기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고령화가 심각한 한국 농촌 현실의 은유’라는 뼈 아픈 진단을 내린다. 주인공은 주체이고 공무원과 대기업은 풍자의 대상이다. 영화 주인공들이 바라는 직업은 아니지만, 또래 청년들이 바라는 ‘한국의 이상적 직업’이라는 점에서 풍자의 대상이 된다.

도전하는 이들의 비장미

이들의 여행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여행자금이 부족해도 떠날 수 있었던 건 우프 때문이었는데, 우프에 참여하는 농가를 찾기가 어려웠다. 호주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수많은 농가에 이메일과 전화로 연락하지만, 대부분 농가가 거절한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생활공간을 쉬이 내줄 리 없다. 이 장면에서 객체인 우프 농가와 주체인 청년은 완벽한 대립을 보이지는 않지만, 갈등을 빚는다. 비장미는 이루어지기 힘든 목표에 대한 도전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낯선 땅에서 겪는 외로움, 좌절,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갈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안고 그들은 계속 도전한다.

▲ 주인공은 80군데 우프 농가에서 거절당했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 영화 파밍보이즈 갈무리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유럽에서도 도전은 계속된다. 청년실업률이 40% 이상인 이탈리아에는 농사지을 땅이 필요한 청년들이 국유지를 무단 점거해 공동체 ‘테라베네 코뮨(Terra Bene comùne)’을 이루며 살고 있다. 이들이 도착했을 때, 이탈리아 전역에 폭염과 가뭄이 두 달째 이어지고 있었다. 농사일을 도우며 먹을 것을 얻고 생활공간을 확보해야 했던 이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생활용수로 쓰이는 빗물을 받은 물탱크도 바닥났고, 척박한 땅에는 폭염까지 더해져 작물이 자라지 않았다. 이탈리아 청년들과 한국 청년들은 날씨에 좌우되는 농사의 흉풍을 고되게 경험한다. 죽어가는 감자를 살리기 위해 목화솜을 떼어다 물을 묻혀 땅을 적시는 그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자연에 경배하는 인간에 대한 예우

영화에는 아름다운 자연도 등장한다. 이들은 돈을 아끼기 위해 장거리인 알프스산맥을 걷고 국경을 넘는다. 고전문학에서 숭고미는 자연과 합일을 바라는 선비나 종교 구도자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엄숙하지만은 않으나 진지하고 성실한 주인공은 구도자의 면모를 닮았다.

▲ 알프스산맥을 지나 도달한 프랑스 떵드에서 젊은 농부에게 땅을 무상 임대하는 테아드리앙의 지원을 받아 사는 부부를 만난다. © 영화 파밍보이즈 갈무리

주인공이 만난 농부의 모습에서도 숭고미를 느낄 수 있다. 벨기에 몰리 공동체지원농장(CSA)은 농민과 소비자가 긴밀하게 접촉하기 위한 농장으로, 소비자가 생산 공동체를 선택해 농사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소비량을 선주문하는 개념으로 운영된다. 그곳에서 만난 마르틴은 ‘평생 몸을 굽혀 농사를 짓는’ 사람이다. 작물과 비슷하게 생긴 잡초를 뽑기 위해 상체를 숙이고 땅에 붙어 풀을 뽑는다. 청년들은 마르틴을 보며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낮추 듯 식물을 사랑하는 농부가 자세를 낮추는 것’ 이라 적는다. 꼬박 하루를 몸 굽혀 일해야 하는 노동이지만 고통보다 수행하는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마르틴은 땅에 자신과 농사를 맡기는데, 하늘을 보며 오체투지를 하는 종교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 공동체지원농장에서 일하는 마르틴은 땅과 가까운 자세로 농사를 짓는다. © 영화 파밍보이즈 갈무리

농사와 닮은 농부, 농부를 닮은 청년

우아미는 주체와 객체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나란한 위치에 설 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다. 미적 범주 중 갈등 요소와 상하 관계가 가장 적은 개념이다. 힘들게 일하는 세계 농부를 보며 청년들은 자신의 자격에 의문을 던진다. ‘나는 농부가 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벨기에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땅의 70%를 농지가 없는 청년 농부에게 나눠준 엘리자베스로부터 멋진 말을 듣는다.

“화학약품을 쓰던 농장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어. 끊임없이 땅이 갈아엎어지며 생태계가 파괴되는 걸 봤어. 생태계에 무리가 덜 가는 ‘무경작 보존 농법’을 쓰고, 화학약품과 비료를 아예 쓰지 않는 완전한 유기농농장을 만들고 싶었어. 우리는 자연을 믿어. 자연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주지. 지금 사람들은 자연에 돌려주지 않고 자연을 신뢰하지 않아서 너무 많이 가져가. 자연에 조금이라도 돌려주지 않으면 안 돼.”

이 말에 공감한 청년들은 남은 여행 내내 ‘페이백 정신’을 외친다. 사실 그들은 페이백 정신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굶는 아이들을 보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농업에 관심을 가진 유지황 씨, 고향 산청에 청년들이 가득하기를 꿈꾸는 권두현 씨, 진로 고민 끝에 농사를 선택한 김하석 씨는 애초 농사와 닮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여행하면서 만난 농부들의 성실함과 겸손함에 탄복한다. 경이로운 자연과 함께하고 ‘뿌린 만큼 거두는’ 농사의 마법에 빠진다. 해지는 하늘에 절하고, 방을 내어준 농부에게 직접 지은 노래를 불러주며 배운 만큼 갚겠다고 다짐하는 그들의 모습은 자연과 닮았다. 비장미와 숭고미, 골계미를 걷던 그들은 자연과, 농사와, 농부와 닮은 모습을 보여주며 우아미에 도달한다.

▲ 벨기에에서 들은 ‘페이백’ 정신은 여행을 관통한다. © 영화 파밍보이즈 갈무리

갈매기 떼에 던지는 농업취업준비생의 열쇠꾸러미

1960년대 프랑스 문학을 연구하던 독일의 야우스는 ‘수용미학’ 개념을 통해 텍스트 해석의 우선권이 독자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전까지 예술작품은 완성도와 형식, 작가의 관점 등 텍스트 내재 요소만 분석 대상이었다. 수용미학 개념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독자의 안목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텍스트의 해석에 주목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취업준비생으로서는 경쟁사회와 꿈을 고민하게하는 영화다. 농사짓는 이에게는 유기농법과 농사공동체를 생각하는 계기를 준다.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사람은 영화를 보며 미래를 고민하는 방법과 방식을 배울 수 있다.

▲ 여행을 마친 이들은 귀농, 협동조합 취직, 청년 농부를 위한 집 짓기 사업 등 대안적 삶과 관련된 진로를 결심한다. © 영화 파밍보이즈 갈무리

이 영화의 매력과 가치는 여기에 있다. 유기농법, 농사공동체, 취업난 같은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청년의 눈과 발로 이야기한다. 당신이라면 이 청년들의 여행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끼겠는가?


편집 : 이신의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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