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독립열전] ⑨ 우당의 무장투쟁사

<앵커>

(최유진) ‘세상에 풍운이 많이 일고 해와 달은 사람을 급히 몰아치는데 이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임지윤 기자! 이 시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신가요?
(임지윤) 네. 솔직히 저도 이번에 알게 됐는데요.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 독립 운동가들을 양성한 우당 이회영 선생입니다. 
(최유진) 그렇습니다. 서재필 박사가 1896년 창간한 독립신문 아시지요. 독립신문에 1897년 실린 사설을 읽고 지은 <소년 30세시>라는 시의 한 구절입니다. 임지윤 기자! 우당의 집안 내력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임지윤) 네, 우당은 조선중기 이후 대대로 고위 관료를 배출하던 명문가 집안 자손이지요. 지배계층이면서도 민족의식이 강하고, 무장투쟁과 혁명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했던 독립운동가입니다. 최유진 기자! 우당만 그런 게 아니지요?
(최유진) 네, 맞습니다. 우당이 중심이 돼 형제들과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에 몸을 바칩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오던 수많은 전답도 정리해 독립운동을 위해 썼고요.
(임지윤) 우당을 비롯한 6형제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풍족한 삶을 버리고 고초도 많이 겪었는데요. 우당 이회영 6형제의 지난했던 독립운동사를 윤종훈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서울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은 명동. 명동 거리 안쪽으로 들어가면 서울YWCA 건물이 보입니다. 을지로로 연결되는 이 작은 골목길이 2017년 중구청이 새로 이름 지은 ‘우당 이회영길’입니다. YWCA 건물 옆 바로 이 자리가 우당 이회영 생가터입니다. 생가터에 우당의 흉상을 세워 우국충정을 기립니다. 흉상 옆에는 생가터를 알리는 작은 표지석도 설치했는데요. 표지석에는 이회영, 이시영 6형제 집터라고 쓰여 있습니다.

# 아버지 이유승, 이조판서 지내고 을사늑약체결 반대

우당 6형제는 조선 중기 문신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입니다. 6형제의 아버지 이유승은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로 1905년 을사늑약체결 반대를 주청한 애국지사입니다. 부친의 반일 애국정신은 이들 6형제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6형제는 이곳 명동 일대에 갖고 있던 땅을 모두 정리해 독립운동에 쏟아 붓습니다.

# 독립운동에 바친 재산, 현재 가치 약 2조원 대

1910년 12월 만주로 간 우당 이회영 일가가 독립운동에 바친 돈은 얼마나 될까? 명동과 고양시 일대의 노른자위 땅인데, 현재 기준으로 대략 2조원 대라는 분석입니다. 이 자금을 기반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요.

인터뷰) 이종찬 우당기념관장 / 이회영 손자

“<매천야록>에 의하면 우리 집안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위해서 쓴 토지가 어느 정도 많으냐 하면 남양주시에서 지금 남양주시, 그 당시에는 양주인데. 남양주시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왔다 이거야. 그만큼 많았다. 전부 우리땅이였다. 그렇게 많진 않았을 텐데 이분은 말하자면 그만큼 땅이 많았다 이런데. <신동아>라는 잡지가 있죠? 1969년에 그 토지와 이것을 쌀로 계산했어요. 소로. 어떤 기준을 세울 수 없잖아요? 화폐가 그 당시에 같은 것도 아니고. 쌀로 계산하고 화폐로 계산하고 한 것이 1969년에 600억이야, 1969년에. 그런데 1969년에... 지금 얼마예요? 60년이 지났죠? 그런데 지금도 인용할 때 600억으로 인용하거든. 그건 인플레이션도 안 되는 거야, 그 기록은. 1969년에 계산해서 봤을 때 그 당시에 화폐로서 가치가 600억이면 2019년 지금은 얼마겠느냐? 주먹구구로 계산해도 약 2조 쯤 되지 않겠느냐 생각이 드는데.”

# 1911년 신흥무관학교 세워 항일투쟁 전개

하사관반 3개월, 특별훈련반 1개월, 장교반 6개월 3개 과정을 운영합니다. 3·1운동 뒤에는 학생 수가 600명에 이를 만큼 독립투사 양성소로 자리매김합니다. 10년 간 3500명의 독립군 장교와 병사를 길러 냅니다. 이들은 훗날 광복군의 중심인물이 돼 항일투쟁의 선봉에 섭니다.

인터뷰) 이종찬 우당기념관장 / 이회영 손자

“처음부터 교육 커리큘럼 내용은 무관학교 교육 내용이지만 명칭은 신흥강습소,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 이렇게 발전시킨 거죠. 그래서 그 돈으로 다 세웠고. 그래 갖고 1911년서부터 1920년까지 말하자면 10년 동안 약 3천여 명의 간부들을 양성했다 이거죠, 독립군 간부를. 그 사람들이 독립전쟁에 참여해서 봉오동, 청산리... 자잘한 전투부터 시작해서 큰 전투까지 전부 참여해서 싸웠다고. 무장투쟁, 독립투쟁을 했죠.”

이렇게 활약한 형제들에게 돌아온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첫째인 이건영 선생은 만주 독립투쟁시기 얻은 질병으로 평생을 고생합니다. 도피생활 끝에 광복 전인 1940년 순국합니다. 신흥무관학교 운영자금 대부분을 담당했던 둘째 이석영 선생의 삶은 더욱 비참합니다. 빈털터리가 돼 일제를 피하다 결국 상해의 빈민가에서 영양실조로 1934년 순국합니다. 셋째 이철영 선생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 풍토병을 얻어 1925년 순국합니다.

인터뷰) 이종찬 우당기념관장 / 이회영 손자

“우리 둘째 할아버지는 그 양반은 바로 양자를 가신 분이에요. 우리 집이 원래 돈이 있는 집은 아니고 양자 간 집이 돈이 많았어요. 이유원 대감이라고. 말하자면 고종 때 영의정 하신 분이거든요. 그분 댁으로 양자를 갔는데. 그분 돈이 아까 얘기한 양주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왔다는 건 그분의 재산이라고. 그분은 자기의 재산을 다 내놨다고. 그리고 마지막에 상해에서 굶어죽다... 돈이 없어서 굶어 돌아가실 정도로 비난한 생활을 하셨단 말이에요.”

# 다섯째 이시영 제외한 나머지 형제, 광복 전 순국

넷째 이회영 선생은 잠시 뒤 다시 살펴보고요. 다섯째 이시영 선생만 유일하게 중국에서 광복을 맞습니다. 이시영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는데요. 1945년 11월 백범과 함께 환국한 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냅니다. 신흥무관학교의 후신격인 신흥대학을 세워 운영하다 1953년 6·25때 별세합니다. 신흥대학의 후신이 경희대학교입니다. 여섯째 이호영 선생의 삶은 더욱 비극적입니다. 만주에서 의병 활동 중 일본군의 습격으로 가족이 함께 몰살당합니다. 그렇게 순국한 조선 10대 부잣집 막내 아들은 시신조차 찾지 못합니다.

인터뷰) 이종찬 우당기념관장 / 이회영 손자

“여섯 형제가 다 나가서 싸우는 바람에 그 자녀들도 다 함께 나가서 싸웠다 이거죠. 비근한 예로 우리 삼촌을 따지자면 그 양반은 상해에서 붙잡혀서 요인 암살하고선 붙잡혀 가지고 1932년에 붙잡혀서 1945년에 해방되고 말하자면 자유를 찾았죠. 13년간 형무소에 있었고. 나머지 우리 아버지는 고문 당해서 반신불수가 됐고. 모든 자녀들 다 불행한 역사를 살았다 이거죠.”

서울시 종로구 신교동에 있는 우당 기념관입니다. 원래 1990년 종로구 동숭동에 만들었다, 지난 2001년 현재 위치로 옮겨 왔습니다. 우당의 일생을 조명하는 각종 자료가 전시돼 탐방객을 맞습니다.

인터뷰) 황원섭 우당장학회 상임이사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 동지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서 세워진 기념관입니다. 우당 선생을 통해서 우리 사회 지도자들이 어떤 길을 걸어야할까 하는 지도자의 사명,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하죠. 그거를 우리한테 보여주신 분입니다. 우당 선생을 통해서 우리 지도자가 나아가야 할 길, 그걸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소단위 자유공동체들이 연합하는 아나키즘 채택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모든 부와 특권을 버린 우당 이회영. 가난하게 살면서도 가장 진보적인 아나키즘 혁명의 길을 선택합니다.

인터뷰) 이종찬 우당기념관장 / 이회영 손자

“무정부라는 건 정부가 없단 얘긴데. 그게 아니라 강력한 폭력에 의한 정부가 없단 얘기예요. 제왕적 정부가 없단 거예요. 정부는 있되 이것이 합의된 정부, 그러니까 자유공동체에 의한 정부다 이거지. (오역이 됐다는 얘기군요.) 나는 아나키즘이라는 것이 무정부주의가 아니고 자유공동체주의, 자유공동체를 만들자 이거예요. 소단위의 자유공동체가 있고 해서 연합하는 이런... 자유공동체는 뭐냐? 인간이 스스로 참여해야 되고 필요 없으면 탈퇴할 수 있는 것이 그렇다 이거예요.”

# 임시정부·공산주의 노선과 거리를 둔 우당, 이유는?

임시정부 노선과 공산주의 노선과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무장투쟁의 길을 걷습니다. 이 때문에, 해방 후 남북 양쪽에서 비주류로 외면당하는 수모도 겪습니다.

인터뷰) 이종찬 우당기념관장 / 이회영 손자

“나라만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였어요. 찾고 나서 어떤 사회를 만들겠느냐? 그냥 정치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뭘 위해서 정치를 하는 거냐? 어떤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하는 거냐? 이걸 생각을... 큰 그림부터 생각해야 된다 이거죠. 이런 것을 우리 선인들은 먼저 생각을 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 1932년 중국 여순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순국

뒤에 보시는 건물은 우당 이회영 선생이 순국하신 중국 여순 감옥입니다. 우당은 1932년 66살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만주지역 무장투쟁 조직 건설을 위해 대련으로 가다 일제에 체포됩니다. 이후 여순 감옥으로 끌려와 이곳 감방에 수감돼 모진고문을 당합니다. 고문 끝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그해 11월 순국하고 맙니다. 중국 정부도 여순 감옥의 우당선생이 수감됐던 방을 특별히 보호 하고 있을 만큼 그의 항일 투쟁을 높이 평가합니다.

인터뷰) 이종찬 우당기념관장 / 이회영 손자

“1932년 11월 항일해서 장렬하게 희생해서 여기에 혁명열사로서 특별히 이 장을, 이 증을 줘서 포상하노라 하는 이 글을 써서 2000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혁명열사로 명명을 해줬어요. 이게 중요하죠. 왜냐, 우리나라에서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그 나라와 더불어서 같이 항일투쟁을 했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 누구도 지배하거나 지배받지 않는 사회를 향한 이회영의 꿈과 이상을 후손들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단비뉴스 윤종훈입니다.

(영상취재 : 윤종훈 / 편집 : 윤종훈 / 앵커 : 임지윤, 최유진)


편집 : 박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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