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재생’

▲ 조현아 PD

내 동생은 스타벅스 후원자다. 후원금을 보내서가 아니라, 정기적으로 물품을 사기 때문이다. 동생은 취미로 텀블러를 수집한다. 각국 스타벅스에서, 또는 새로운 디자인이 출시될 때마다 스타벅스 텀블러를 산다. 엊그제 선반 위에 스타벅스 텀블러가 또 하나 늘었다. ‘거대 다국적기업을 왜 후원하느냐’고 한 소리 하긴 했지만 새로 놓인 예쁜 텀블러에 눈길이 간다. 보기 좋은 컵이 맛도 좋게 하려나? 나도 새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보고 싶은 욕망이 한 켠에 생긴다.

우리는 ‘사야만 살 수 있는 사회’에 산다. 무언가를 사야 삶 속의 기본 욕구를 채우고 사회적 지위도 인정받을 수 있다. 내가 사는 것이 곧 나는 아니지만, 나를 일부 대변하는 것은 사실이다. 고가 옷과 신발, 세련된 텀블러... 각종 광고와 마케팅, 유행은 계속 소비하라고 속삭이고,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포장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며 돈을 낸다. 내 돈은 한정돼있고, 눈에 보이는 상품은 무수히 많다. 인간 일생 상당부분은 한정된 재화로 무엇을 살지 말지 고민하는 시간일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소비와 재화 사이에서 고민하며 사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성장’으로 굴러가는 경제 시스템이다. ‘성장’을 통해 파이(pie)를 키우고, 계속 몸집을 유지하거나 불리려면 반드시 ‘소비’가 필요하다. 기업의 생산량이 줄지 않도록, 이윤 창출이 줄지 않도록 누군가 계속 소비해야 한다. 아마존의 전자책 개발자 제이슨 머코스키는 “소비재 생산 기업은 내일 판매할 기기를 생산하며 이미 그 기기를 대체할 상품을 연구한다”고 말한 바 있다.

▲ 자본주의 체제는 생산과 소비, 투자와 지출로 이루어진다. ⓒ pixabay

이 과정에서 경험하는 게 일종의 ‘가난’이다. 자본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떠나서는 어떠한 필요를 충족할 방법도 사라졌다는 데서 인간은 궁핍을 느낀다. 이반 일리치는 이를 ‘가난의 근대화’라 불렀다. 예전에는 자연에서 자급자족하고 마을 단위로 품앗이도 하며 필요를 채웠던 인간이 지금은 상품과 임금, ‘생산과 소비’의 무한 굴레에 완전히 포획된 것이다. 무언가를 살 재화나 자본이 없는 사람은 ‘물질적 가난’을 경험하고, 소비 능력이 있는 사람 또한 일종의 무능력을 경험한다. 그 무능력은 평생 자신의 노동을 상품으로 교환해야 하는, 하나의 소비재로 전락한 인간이 느끼는 ‘정서적 가난’이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풍요해질 때는, 소비를 떠났을 때다. 상품과 재화, 숫자로 이루어지는 구매 행위를 떠났을 때 우리는 몸과 마음이 풍요해지는 것을 느낀다. 대표적인 것이 자연이다. 내가 무엇을 사지 않아도, 굳이 어떤 소비 행위를 하지 않아도 나는 ‘나’로서 서있을 수 있고,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 ‘스스로 그럴 듯한’ 자연(自然) 속에서 나는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자연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몸집을 키우기 위해 무엇을 더하거나 빼지 않는다. 미국 소설가이자 농부인 웬델 베리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쓰레기란 게 사실상 없거나 아예 없었던 비산업화 문명의 사례들은 쉽게 들 수 있다. 자연적 순환의 테두리 안에서 버려지는 모든 것은 그 순환 안에 남아 거름이 되며, 이 거름은 지속을 가능케 하는 생명의 힘이다. 자연에서 죽고 썩는 것은 사는 것 못지않게 필요한, 아울러 생기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쓸데없이 낭비되는 것은 없다. 그렇게 볼 때 자연에는 생산 같은 것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실은 ‘재생산’만이 있을 뿐이다.”

자연에서 난 모든 것들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다시 재생산하여 순환한다. 인간에게 무한‘생산과 소비’가 있다면, 자연에는 재생산과 순환만 있을 뿐이다. 인위적 생산이나 가공 행위가 없기에, 어떤 부산물이나 과잉 소비, 고갈, 오염도 없다. 모든 것이 태어난 그대로 다시 돌아가는 삶. 끊임없는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으로 순환하는 삶은 풍요롭다. 어쩌면 우리 삶도, 순간의 소비도 ‘순환’에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유행에 따라 핸드폰을 바꾸지 않는 것, 지속 가능성과 수리 가능성 업사이클과 리사이클을 염두에 두는 것, 가급적 DIY 제품을 사용하는 것… 우리 스스로 소비재가 아니라, 자연이란 순환의 일부임을 자각할 때 우리 마음도 풍요로워지며, 다시금 재생되지 않을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임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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