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이기심’

▲ 임세웅 기자

기원전 474년, 로마에 외적이 쳐들어왔다. 적을 눈앞에 두고 평민은 참전을 거부한 채, 근처 아벤티노 언덕으로 올라갔다. 평민의 권익이 보장되기 전에는 전투에 나서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다급해진 귀족은 평민 대표직을 신설해 평민의 이익에 반하는 법안이나 정책을 부결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고 설득했다. 평민이 귀족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시 무기를 들었고, 적을 물리쳤다.

이때 생긴 평민 대표직을 평민을 보호한다는 뜻으로 호민관(護民官, Tribunus Plebis)이라 부른다. 호민관을 두기 전에도 형식적으로 로마에 민주적 의회가 도입돼 있었다. ‘켄투리아 민회’(Comitia Centuriata)다. 하지만, 18세 이상 로마 시민권자가 참석하는 이 민회는 로마 평민을 대변할 수 없었다.

독특한 투표방식 때문이다. 로마시민 100명 단위의 전투부대 켄투리아는 지역별로 구성한 게 아니다. 최상류층 기병, 중무장 보병, 경무장 보병, 맨손의 가난한 평민 등 무기조달 능력 순으로 만들었다. 투표는 193개 전체 켄투리아가 한꺼번에 하는 게 아니다. 부유한 기병 켄투리아부터 시작해 가난한 켄투리아로 내려간다.

그러니, 경무장 보병 켄투리아로 가면 이미 과반이 결정돼 투표가 끝나버리기 일쑤였다. 평민은 투표에 참여할 기회조차 없었다. 결국 국가 안보를 담보로 이런 불합리한 점에 항의했고, 그 결과 얻은 호민관은 켄투리아 민회에서 통과된 부자 법안과 정책을 거부할 수 있었다.

▲ 투표는 부유한 기병 켄투리아부터 시작해 가난한 켄투리아로 내려간다. 그러니, 경무장 보병 켄투리아로 가면 이미 과반이 결정돼 투표가 끝나버리기 일쑤였다. 평민은 투표에 참여할 기회조차 없었다. ⓒ pixabay

2019년 봄 한국에서 기원전 474년 로마 평민의 전략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주역은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노동자가 경제정책 결정과정에 들러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사노위 구조를 보면 민주노총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경사노위는 노와 사측 대표 각 5명, 공익위원 4명으로 구성된다. 노사 양측 의견이 팽팽하기에, 결국 공익위원의 선택이 중요 변수다. 공익위원이 노동자 편에서 표결하기는 쉽지 않다. 마치 로마의 평민이 켄투리아 민회 표결에서 실질적으로 배제되는 것처럼 한국의 노동자는 사측과 정부 논리에 밀려 권익을 보장받기 힘들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성장률 3%를 넘지 못하는 저성장이 이어진다. 침체기에는 노동자의 희생이 강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구조조정, 임금삭감이나 동결을 통해 가까스로 기업이 살아나도 희생당한 노동자의 권리는 복원되지 않는다. 아니 그 반대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사정위원회에서 노측이 정리해고와 파견근로 법제화에 합의해 준 결과는 비정규직 양산, 근로빈곤층 형성으로 이어졌다. 노동자 권리는 줄고, 양극화는 심해졌다. 선진국도 예외는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역할 모델로 삼는 네덜란드의 사회적 대타협 ‘바세나르 협약’ 역시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정규직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삭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자가 이기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국가경제를 위해 다 같이 노력해야 하는 시기에 자신들 생각만 고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집단>에서 ‘모든 집단은 자기 견해를 관철하기 위해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통찰을 보여준다. 노동자만 이기적인 게 아니다. 사측 역시 철저히 자기 입장에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 만들기에 골몰한다. 법을 만들고 정부를 구성하는 정치권 역시 표심을 고려한 정책을 편다. 

모두 이기적이지만, 각 집단이 생존을 위해 이기적으로 다투는 가운데 힘의 균형점에서 협상이 가능해진다. 사측과 정부의 이기적 행동에는 관대하면서 노동자의 이기심에 쌍심지를 켜는 이중 잣대로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어렵다. 로마 평민이 이기적으로 행동해 권리를 보장받으며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떠올려 본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황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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