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독백’은 어떻게 ‘대화’가 되는가

▲ 임세웅 기자

불쑥, 허리춤에 불쾌감이 일었다. 불쾌감은 허리에서 엉덩이까지 뻗어갔다. K는 가만히 얼굴을 돌려 자기 허리와 엉덩이 사이 살덩이를 바라봤다. 세월을 곱게 맞은 50대 남자가 겸연쩍은 표정과 함께 황급히 손을 치운다. K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OO 대표님 말씀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 K도 통역 자리에 가 앉는다.

집에 돌아온 K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K는 중얼거렸다. ‘나는 예쁜 도구다.’ K는 어머니의 조언을 생각했다. ‘네가 너무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어서 남자들이 홀린 것이야.’ ‘그나마 걔네는 양심은 있네? 미안해하며 너에게 더 잘해주려 한다며.’ 동료 통역사들의 논리도 떠올렸다. 우리는 통역 도구이고, 고용인은 사용자야. 사용자는 도구에 흠이 날 때마다 보상해야 해. 지갑이 만들어낸 불쾌한 감촉이 떠오른 K는 또다시 한 자씩 힘주어 내뱉었다. 나는 어쨌든 성공했다. 성공의 기분이 불쾌감을 덮었다.

“요즘 어때?” 

갑작스럽게 대학교 동기 I한테서 연락이 왔다. K는 직감했다. 또 일 부탁 전화다. K가 통역사로 성공하고 나서는, 어떻게 알았는지 예전 인연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돈 좀 빌려 달라’, ‘통역이 필요한데 한번 와 줄 수 있느냐’ 따위의 전화였다. K는 그때마다 부드럽지만 건조하게 거절했다. K는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I는 거부하기도 뭐한 독특한 부탁을 했다. 

“K야, 이번 주 토요일 시간 있어?” 

“시간은 있는데...” 

“마스크는 있어?” 

“있긴 한데...” 

“그럼 이번 주 토요일 혜화역에서 점심 한번 먹자. 내가 살게! 편하게 나와!” 

“아니...” 

“그때 보자!”

▲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나의 자궁은 나의 것' 여성 시위는 외친다. "여성은 도구가 아니다." ⓒ pixabay

“날 굳이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가 뭐야?” 

K는 I에게 물었다. 근처에서는 한 여성단체가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I는 K를 외면한 채 시위 현장을 보며 말했다.

“너, 마지막으로 소리 질러본 적이 언제야?” 

K도 시선을 I에게서 시위 현장으로 옮기며 답했다.

“무슨 말이지?” 

그러면서도 K는 마지막으로 소리를 질렀던 때를 떠올렸다. 몇몇 기억들이 사진처럼 스쳐 갔다. 처음으로 통역 중 엉덩이를 잡히고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통역 못 해 먹겠다며 악을 썼을 때, 아무 말 없이 나를 안고 떨었던 어머니의 모습. 국내 최고 통∙번역대학원에 합격하고 ‘최고 통역사가 돼서, 돈 많이 벌어서 엄마 호강시켜 줄게’라고 외쳤던 기억. 이천만 원이 넘는 학자금 대출과 이와 별도인 생활비 대출 통장 등.

“너 답답할 때면 노래방에서 소리 지르곤 했잖아. 시위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소리나 한번 크게 지르고 가자고.” 

I가 K를 보며 말했다. 게임이나 하자는 듯한 가벼운 말투에 K는 홀리듯 I를 따라 시위 현장으로 들어갔다. 집회자 모두가 그들을 환호하며 맞아줬다. 한쪽에서는 주최 측 관계자 같은 이가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지금껏 남성들은 여성을 동등한 대상으로 보지 않고 상품으로 보아 왔습니다.”

K는 가슴이 무언가로 쿡쿡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연단에서는 시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도구가 아니다!”

K도 구호를 따라 중얼거렸다. “우리는 도구가 아니다.” K는 자신을 보고 웃는 I의 시선을 느꼈다. K의 마음을 찌르던 무언가가 이제 온몸을 통째로 흔들고 있었다. K는 속이 울렁거렸다. “우리는 도구가 아니다!” K는 속을 게워내듯 외쳤다. 세상이 떠나가라 외쳤다.

그날 I와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내가 샀다. 집에 돌아와 통∙번역 일지 한 귀퉁이에 적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인간화한 관계, 대화가 가능한 관계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비인간화한 관계, 대화가 단절된 관계, 독백만 가능한 관계다.’ 통역 공부를 하면서 읽었던 마르틴 부버 글이다.


편집 :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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