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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잇는 ‘피스 올레’를 꿈꿉니다”
[단비인터뷰] 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2019년 05월 21일 (화) 22:08:22 장은미 기자 josinrunmi@naver.com

“올레길이 모두 자식 같아서 어떤 길이 더 좋다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저마다의 매력이 있어서 어느 계절에 누구와 왔느냐에 따라 추천할 수 있는 길이 달라요.”

‘올레길의 어머니’로 불리는 서명숙(62)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에게 추천 코스를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다. 올레길의 나이는 12살, 총 425킬로미터(km) 26개 코스가 제주도 둘레를 고루 잇고 있다. 한일 양국 시민 1천여명이 한배에 타고 동북아시아의 환경과 역사문제 등을 토론하는 ‘피스 앤 그린보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난달 15일 오전 서명숙 이사장과 참가자 30여명이 서귀포 모슬포항과 송악산을 잇는 올레 10코스를 걸었다.

   
▲ 올레길을 만든 과정과 제주의 역사를 설명하는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 장은미

‘속도전 관광’에서 ‘자연에 녹아드는 여행’으로

‘올레’는 제주 사투리로 ‘좁은 골목’이란 뜻이다. 큰 도로에서 집까지 이어지는 좁다란 길을 말한다. 서 이사장은 지난 2007년부터 지역주민, 군, 자원봉사자 등과 손잡고 제주 구석구석에 걷기 좋은 길을 만든 뒤 ‘올레길 1코스’ 등으로 번호를 붙여나갔다. 제주올레 재단이 10주년인 2017년에 집계해 보니 연인원 약 726만명이 올레길을 걸었다.

올레길은 사람들의 여행 패턴을 바꿔 놨다. 유명 관광지를 ‘빨리 빨리’ 정복하는 데 젖어있던 사람들이 천천히 걸으며 자연에 녹아드는 여행을 즐기게 됐다. 서 이사장은 “그동안 우리는 여행마저도 속도전으로 전쟁 치르듯 해왔던 것은 아닐까”라고 물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 반향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물론 내가 길에서 받은 위로에 공감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가깝고, 더 아름다운 제주니까요.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모아야하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죠. 그저 몇 사람만이라도 나처럼 길에서 힐링(치유) 받았으면 했어요.”

사람들이 올레길에 열광한다는 것은 그만큼 피로하고 지쳐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서 이사장은 말했다. 그도 올레길을 내기 전까지 그렇게 살았다. <시사저널>과 <오마이뉴스> 등에서 23년간 기자생활을 했을 때,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을 듣기 싫어 악착같이 일했다. 별명이 ‘마녀’ ‘뚜껑 잘 열리는 사람’이었을 정도.

그러다 마흔 일곱 무렵부터 ‘회사가기 싫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프기 시작했다. 죽을병에 걸린 게 아닐까 싶어 병원에 갔는데 의외로 별 이상이 없었고 의사의 권유는 ‘운동하라'였다. 이 운동, 저 운동 돈을 쓰다 만나게 된 것이 ‘걷기’였다.

정원석 길과 흙길, 어느 쪽을 원하나

   
▲ 제주 올레길 10코스를 걷고있는 서명숙 이사장. 그는 걷기가 가져오는 힐링을 올레길을 통해서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말한다. Ⓒ 장은미

30년 만에 내려온 고향 제주에서 올레길을 낼 때 서 이사장은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되도록 아스팔트길은 피하고, 사라진 옛길을 찾고, 인공적인 설치물을 자제하는 것이었다. 자연과 주민의 삶, 지역의 역사와 문화 등 모든 것이 마을에 있으니 저마다 개성을 가진 마을을 지나게 하면서 아픈 역사와 해녀 문화까지 제주의 ‘속살’을 살뜰하게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모든 올레길은 마을에서 시작하고 마을에서 끝난다. 그래야 버스와 택시로 접근할 수 있고 여행자들이 걷다가 쉴 수도 있다. 서 이사장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길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라며 “올레길을 통해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알면서 제주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여행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초창기에는 지방자치단체의 인식 부족으로 시행착오도 있었다. 어느 날 신문에 ‘올레길을 명품 코스로 업그레이드 했다’고 나와서 가보니, 지자체에서 코스를 정비한다고 정원석을 까는 등 현대식 공사를 해놓았다. 서 이사장은 “흙을 밟고 싶어 가는 길이었는데 오히려 돈 들여 길을 망가뜨린 것”이라고 말했다.

올레길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는 요즘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날 서 이사장과 함께 걸었던 송악산 일대도 중국 자본의 ‘뉴오션 타운’ 개발사업 추진계획이 나온 곳이다. 제주올레는 지난달 초 반대 성명을 냈다. 서 이사장은 “10코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주 전체에 난개발로 자연이 파헤쳐지고 생태가 망가지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며 “이런 개발은 제주가 갖고 있는 매력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걱정했다.

알뜨르 비행장과 삿알오름, 비극의 현장을 걸어 

   
▲ 제주도 서귀포 서남쪽에 위치한 올레 10코스. 사계 해변 쪽에서 송악산을 둘러 섯알오름과 알뜨르 비행장을 지나 모슬포항까지 이어지는 동선이다. ⓒ 제주 올레

백사장이 있는 하모해변에서 시작된 올레길 초반에 일행은 ‘재밌는 장치’를 만났다. 나뭇가지를 엮어 공중에 간이지붕을 만들고 사람들이 터널처럼 통과할 수 있게 한 곳이었다. 올레길을 좋아하는 한 남자가 올레꾼들에게 볼거리를 주고 싶어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서 이사장은 “이렇게 좋아하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게 바로 올레길”이라며 미소 지었다.

출발한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찻길을 건너 널따란 무밭을 지나자 첫 번째 비극의 역사현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약 80만평 규모로 펼쳐진 알뜨르 비행장이었다.

“알뜨르는 ‘아래 벌판’이라는 뜻이에요. 일제 강점기에 중일전쟁을 대비해서 이곳에 비행장을 조성했어요. 지역 주민들에게 좁쌀밥 한 덩이와 곡괭이를 쥐어주었죠. 그들이 맨손으로 지은 곳이에요. 스무 개가 넘는 비행기 격납고가 이곳에 있는데 동굴 같기도 하고 설치 미술 같기도 하죠? 일본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터지지 않았다면 제주도가 전쟁터가 됐을 거예요.”

알뜨르 비행장 인근에는 최평곤 작가가 대나무를 엮어 만든 9미터(m) 높이의 ‘평화를 염원하는 소녀상’이 있고 제주4.3 사건 때 수많은 마을 주민들이 ‘용공 반란자’로 몰려 학살된 섯알오름도 있다. 서 이사장은 “이곳에서 군인과 경찰이 구덩이로 마을 사람들을 몰아넣어 마구잡이로 사살했는데, 6년 후에 보니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뼈가 다 엉켜 붙어서 구분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때 수습된 유해들은 ‘백조일손(百祖一孫)’으로 불린다. 백 명 넘는 사람들이 같은 날 죽고 함께 묻혀 무덤과 제삿날이 같으니, 그 자손이 하나라는 뜻이다.

천천히 걸어야 보이는 제주의 ‘속살’

 
서명숙 이사장이 안내한 제주 올레길 10코스. 하모해수욕장에서 출발해 숲길을 지나고 알뜨르 비행장과 섯알오름, 제주 4.3 학살터, 산방산이 보이는 바다까지 걸었다. Ⓒ 장은미

비극의 현장들을 뒤로 하고 오르막을 조금 걸어 나가니 ‘인생샷’을 찍을 만한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졌다. 푸르른 목초지와 파란 하늘, 쪽빛 바다가 송악산을 둘러싸고 있었다. 서 이사장은 “천천히 걸으며 이런 풍경을 봐야 제주도의 속살을 봤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서 이사장은 지난해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열린 ‘2018 월드 트레일즈(오솔길) 컨퍼런스’에서 월드 트레일즈 네트워크의 초대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41개국에서 트레일 전문가 등 200여명이 참가한 이 행사에서 서 이사장은 수락연설을 통해 ‘피스(평화) 올레’를 제안했다. 남과 북을 잇는 길을 포함, 세계 분쟁 지역에 평화의 길을 만들자는 의미였다.

이 제안에 참가자들은 기립박수로 호응했다고 한다. 서 이사장은 “연설을 마치고 나오니 여러 나라 대표들이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결 등 저마다의 피스 올레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고 전했다. 서 이사장의 부친은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실향민이어서 ‘피스 올레’는 가족의 간절한 꿈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면 입버릇처럼 ‘통일만 되면 가족들과 목포에서 이북 고향까지 차로 쭉 달려서 간다’는 말을 하셨죠.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제가 이뤄드리고 싶어요. ‘한라에서 백두까지’ 걸어가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려요.”


편집 : 임세웅 기자

[장은미 기자]
단비뉴스 환경부 장은미입니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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