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㊵ 조총

선조 23년 1592년 4월 나고야에 지휘소를 차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진군 명령을 내린다. 1592년 4월 12일 대마도를 떠난 고니시 유키나가는 13일 부산진에 닻을 내려, 부산진 첨사 정발의 항전을 무력화시킨다. 14일 온천물로 이름 높은 동래성으로 올라온다. 고니시는 동래성문 앞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써 펼쳐 보인다. "전즉전(戰卽戰)부전(不戰)가아도(假我道), 싸울 테면 나와 싸우고 아니면 길을 비켜 달라"는 최후통첩이다. 성위에서 이를 바라보던 청주출신의 동래부사 송상현이 이내 큼직한 글귀를 써 아래로 펼친다.

"전사이(戰死易)가도난(假道難),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 결사항전의지를 밝힌다. 하지만, 애국심으로 저항하던 조선 군사들은 왜군의 조총세례에 허무하게 무너진다. 요원의 불길처럼 진군하는 왜군 기세 앞에 24일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패하고, 29일 도순변사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다 목숨을 잃는다. 마침내 5월 2일 수도 한양이 왜군 수중에 떨어진다. 선조는 북으로 몽진하고 도성은 불탄다.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다. 4월과 5월은 이처럼 우리에게 임진왜란의 흑역사를 짙게 드리운다. 임진왜란은 조총(鳥銃)과 떼놓을 수 없다. 일본은 어떻게 조총을 손에 넣었을까?

▲ 동래부 순절도. 송상현과 조선 장졸들이 왜군에 맞서던 모습을 복원한 그림. 국립진주박물관. ⓒ 김문환

송상현의 충절 동래 동헌... 전사이가도난 충렬사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으로 가보자. 동래성에서 왜군에 맞서던 송상현을 비롯해 순국장병들의 위패를 모시는 충렬사가 자리해 호국의 뜻을 기린다. 조선 병사들이 순국한 바로 그 자리에 세운 거다. 충렬사 입구에는 이를 기려 ‘전사이 가도난’이라는 송상현의 글귀를 큼직하게 새겨놓았다. 근처 복천동에는 송상현을 비롯해 동래성 전투에서 숨진 병사들 넋을 기리는 송공단(宋公壇)이 마련됐다. 동래부 전투에 앞서 부산진 전투에서 첨사 정발과 함께 순국한 병사들은 정공단(鄭公壇)에 따로 모셔 기린다.

▲ 충렬사. ‘전사이 가도난’이라는 송상현의 글귀를 새겨놓았다. ⓒ 김문환
▲ 송공단. 송상현과 동래성에서 희생된 장졸들의 넋을 기린다. ⓒ 김문환
▲ 동래부 동헌. 임진왜란 뒤 건축한 건물이다. ⓒ 김문환

이번에는 동래구 수안동으로 가보자. 좁은 시장 골목으로 한옥 건물이 나타난다. 동래부 동헌. 동래부사가 정무를 돌보던 곳이다. 송상현이 이곳에서 군사를 정비해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에 대항한 것일까? 정확한 진상은 알기 어렵다. 송상현이 집무하던 동헌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 건물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여년도 더 지나 인조 14년 1636년 동래부사 정양필이 지었다. 정3품 당산관 동래부사가 근무하던 동래부는 대일 외교나 왜구문제 처리에서 중요한 곳이어서 규모도 컸다.

신립, 천혜의 요충지 조령 버리고 탄금대 배수진

충주시 실금동 남한강으로 가보자. 탄금대(彈琴臺)가 자리한다. 대가야의 우륵이 신라 진흥왕에 귀의하자, 진흥왕은 새로 정복한 변경지역 국원성(충주)으로 보낸다. 여기서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고 해서 탄금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는 우륵의 가야금 전설 보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배수의 진을 쳤다 전멸한 장소로 더 널리 알려졌다. 유성룡의 기록에 따르면 당초 천혜의 요충지 조령에서 왜군을 막으려 하던 계획을 포기한 신립이 탄금대 배수진 작전을 폈고, 훗날 조선출신으로 명나라 원병사령관이 돼 참전한 이여송이 신립의 전술에 안타까워했다고 적는다. 신립과 많은 조선병사들이 왜군의 조총에 속절없이 무너진 쓰라린 패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강물은 아름다운 산세를 배경으로 오늘도 말없이 흐른다.

▲ 탄금대. 소나무숲 아래 푸른 강물이 절경이다. 많은 조선병사들이 수장됐다. ⓒ 김문환
▲ 신립의 묘. 광주시 곤지암. ⓒ 김문환

경기도 이천 시가지에서 신둔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기치미 고개'가 있다. 탄금대에서 수습한 신립의 시신을 실은 마차가 이 고개를 지날 무렵 "어흠"하는 큰 기침 소리를 냈다고 해서 '기치미 고개'라 부른다. 기치미 고개를 넘으면 넓고개(광현)다. 구한말 조선 의병이 일본 침략군에 저항하던 투쟁의 장소다. 넓고개 너머 광주시 곤지암에 평산 신씨 문중묘가 곤지암천이 바라다 보이는 터에 조성됐다. 영의정에 추증된 신립은 이곳에 묻혔다. 조선에 상륙한 고니시의 1군이 부산진에서 정발, 동래부에서 송상현, 탄금대에서 신립을 제압하며 길을 열자 4월 18일 가토 기요마사의 2군, 구로다 나가마사의 3군이 차례로 상륙해 북으로 치고 올라온다. 일본의 고니시군은 평양을 함락시키고, 가토의 군대는 함경도로 진출해 함흥을 거쳐 회령까지 차지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명나라로 가는 도로 만들어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나고야에 10만 명을 남기고, 20만 명을 보내 이런 성과를 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는 오사카다. 오사카를 방문하면 당시 거대했던 오사카성의 윤곽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성은 우리와 달리 성벽 둘레에 방어용 물길, 해자(垓字)를 판다. 이 해자의 규모에서 거대한 성의 면모가 드러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쿄 거주의 도쿠가와 이에야쓰에게 토요토미 지지세력이 패하면서 오사카 성은 대부분 훼손됐다. 그럼에도 해자, 육중한 성벽, 토요토미가 살던 꼭대기 천수각은 장엄한 모습으로 남아 일본의 문화를 전해준다.

▲ 오사카 성 천수각.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처. ⓒ 김문환
▲ 토요토미 히데요시 초상화. 오사카 천수각에 보존된 원본의 복제품이다. TV사극을 통해 알려진 왜곡된 이미지와 다르다. 통신사 황윤길이 보고한 인상에 가깝다. 국립 진주박물관 ⓒ 김문환
▲ 명나라로 가는 도로와 자신이 거처할 곳을 만들라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 담긴 주인장. 복제품. 국립진주박물관 ⓒ 김문환

일제시대 일본의 지배 경험을 가진 우리는 일본을 역설적으로 과소평가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위험하다. 상대를 정확하게 알아야 극복하는 길이 생긴다. 진실을 외면한 채 상대를 낮추기만 하는 것은 소아병적이다. 일본의 능력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조선 침략 위험을 애써 깔아뭉개며 상황을 유리하게 해석하던 선조나 당시 무능한 조정 권력자들과 다를 바 없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원한 것은 중국 명나라 정복이었다. 토요토미가 조선 출병 장수들에게 명한 문서를 보면 중국으로 가는 도로를 조속히 개설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아울러 자신이 진두지휘할 거처를 마련하라는 명령도 내린다. 단순한 조선정복이 목표가 아니라 조선에 상륙해 명나라로 가는 전투를 지휘하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일본 큐슈 남단 다네가시마 섬 철포 전래지

토요토미는 중국 정복의 야욕을 당시 필리핀의 스페인 총독, 인도 고어지방 포르투칼 총독에게도 내비친다. 일본은 꽉 막힌 조선과 달리 어떻게 명나라 정복의 꿈을 키우고 세계 각국과 통교할 수 있었을까? 일본 큐슈 남단 가고시마 근처 다네가시마 섬으로 가보자. 최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큐슈 최북단 후쿠오카에서 신칸센을 타고 큐슈 최남단 가고시마로 먼저 간다. 가고시마는 일본 개항을 이끈 개화파의 본거지로도 이름 높다. 제주도보다 훨씬 남쪽이어서 기후도 온화하고 무엇보다 거대한 화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이국적이다. 가고시마에서 배를 타고 다시 남쪽으로 2시간여 달리면 다네가시마 섬이 나온다. 우리말로 종자도(種子島). 남아시아에서 일본으로 처음 고구마가 전래된 곳이고, 조선 후기 우리에게 고구마가 전해진 것도 이곳을 통해서다.

▲ 철포전래지 기념 공원. 조총을 든 일본 무사의 모습을 조각했다. 다네가시마 섬. ⓒ 김문환
▲ 철포전래기공비. 다네가시마 섬. ⓒ 김문환

다네가시마 섬에서 다시 최남단으로 차를 타고 가면 바닷가에 일본의 우주과학기지이자 우주선 발사기지가 나온다. 우리로 치면 전라남도 나로도 비슷한 곳이다. 우주기지 근처 바닷가에 철포전래지 소공원이 자리한다. 철포(鐵砲). 조총을 일본에서는 화승총(火繩銃), 혹은 철포(鐵砲)라고 부른다. 겁 없는 사람을 ‘무대뽀’라고 하는데, 일본말 무철포(無鉄砲, 무대뽀)다. 총도 없이 목숨 내놓고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조총은 하늘을 나는 새(鳥)를 떨어뜨린다는 명나라식 이름이다. 공원에는 뜻밖에 포르투칼 해군이 1983년 이곳에 세운 기념물이 보인다. 포르투칼 상선 상륙기념비라고 쓰여 있다. 무슨 사연일까?

향료 무역 포르투칼-스페인 경쟁이 세계일주 길 열어

일본이 철포 즉 조총을 입수하게 된 경위는 포르투칼과 맞물린다. 1498년 포르투칼은 바스코다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에 이어 1510년 인도 고어지방을 식민화한다. 인도네시아까지 온 포르투칼은 몰루카제도 향료사업에서 큰돈을 번다. 마젤란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젤란은 문제가 생겨 스페인으로 넘어간다. 마젤란은 몰루카 제도로 가는 동쪽 항로를 포르투칼이 장악하고 있으니, 서쪽으로 돌아 몰루카로 가자고 스페인 왕에게 제안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아래다. 1522년 마젤란은 그렇게 인류사 최초의 지구일주 탐험을 성공시킨다. 마젤란이 필리핀에서 죽지만, 그의 부하들이 스페인으로 돌아가 가능한 일이었다.

▲ 포르투칼 해군이 1983년 세운 포르투칼 상선 다네가시마 상륙 기념비. ⓒ 김문환

1542년 스페인 탐험가 빌라로보스는 스페인 왕 필립 2세의 이름을 따 ‘필립의 섬’이라는 뜻으로 ‘라스 일라스 필리피나스’라는 이름을 붙였고, ‘필리판’이란 이름은 거기서 나왔다. 1565년 스페인이 필리핀을 식민화하기 전에는 포르투칼 역시 필리핀을 오갔다. 이 무렵 1543년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를 돌아 필리핀으로 올라가던 포르투칼 상선이 그만 태풍에 휘말린다. 요즘 우리나라를 강타하는 태풍도 주로 여기서 발생한다. 태풍에 밀린 포르투칼 상선이 대만과 오키나와를 지나 일본 큐슈 남단 다네가시마 섬에 표류한 것이다.

포르투칼 상인에게 시집간 효녀 덕에 기술 받아

포르투칼 상선이 표류해올 당시 다네가시마 섬 지배자는 16살 청년 도키다카(時堯). 그는 포르투칼 상인이 갖고 있던 조총의 위력을 간파하고 거액을 들여 2정을 사들인다. 포로로 잡아 강제로 취할 수도 있었지만, 교역의 개념으로 파악한 일본의 당시 가치관이 놀랍다. 도키다카는 이어, 부하를 시켜 1년여 만에 조총의 자체제작에 성공한다. 다네가시마 섬 철포 박물관에 당시 일본 최초로 만든 조총의 복원품을 전시중이다. 도키다카는 1544년 이 조총을 상급 영주에게 바친다. 전국시대 각지 영주들이 치열한 전쟁을 펼치던 일본에서 조총은 전쟁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결국 오다 노부나가-토요토미 히데요시 2명의 손에 일본은 내전을 종식시키고 조선침략을 단행한다.

▲ 포르투칼 상선 표류당시 다네가시마 섬 지배자 도키다카 동상. 다네가시마 섬. ⓒ 김문환
▲ 일본이 1544년 자체 제작한 최초의 조총. 복원품. 다네가시마 철포박물관. ⓒ 김문환

도키다카의 동상 옆으로 ‘충효비’라는 작은 돌 기념물이 기다린다. 이건 또 무엇인가? 주인공은 와카사(若狹)라는 여인. 도키다카의 명을 받고 조총 제작에 나선 일본 부하가 방법을 몰라 고민 끝에 포르투칼 상인을 찾아간다. 포르투칼 상인은 그의 딸 와카사를 아내로 요구한다. 고민하는 아버지. 이 말을 전해들은 와카사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결혼에 응한다. 일본여인을 얻은 포르투칼 상인이 기술을 넘겨줬고, 조총이 완성됐다. 와카사는 포르투칼 상인을 따라 인도네시아까지 갔지만, 이듬해 홀로 돌아와 살았다고 한다. 포르투칼 남편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을 터이다. 여인의 효심을 제물로 신기술을 얻었던 일본이 다네가시마 섬에 우주기지를 세워 운영중인 것은 우연치고는 인연에 가까워 보인다.

▲ 충효비. 포르투칼 상인과 결혼해 조총기술을 전수받도록 해준 일본 여인 와카사 무덤. 다네가시마 섬. ⓒ 김문환

천주교도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 조선포로 세례

일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알게 된 포르투칼은 일본과 교류하며 1549년 천주교를 전파한다. 조총이 전파된 지 6년만이다. 당시 기독교를 전파한 주역은 예수회 소속 포르투칼의 사비에르 신부. 가고시마에는 사비에르 신부가 최초로 교회를 세웠던 자리에 기념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포르투칼은 일본의 소개로 1557년 명나라와 만나 마카오를 무역거점으로 할양받는다. 이런 우호관계 속에 일본내 천주교신자가 급격히 늘어난다.

▲ 일본 최초 기독교 전파 기념비. 가고시마. ⓒ 김문환

1579년 15만 명까지 늘어난 일본의 천주교도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임진왜란 당시 1군 사령관이던 고니시 유키나가, 세례명 아우구스티노다. 1587년부터 일본이 천주교 탄압으로 돌아섰지만, 고니시 유키나카는 1만8천명의 천주교신자로 구성된 1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략한다. 그러니까 부산진, 동래부, 탄금대에서 조선 병사들을 몰살시킨 왜군은 천주교도 부대였다. 여기에는 세스페데스를 비롯한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도 따라 들어왔고, 2천여 명의 조선인 포로에게 세례를 해준 것으로 기록된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훗날 토요토미 히데요시 가문과 도쿠가와 이에야쓰 가문이 맞붙어 싸울 때 주군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쓰로부터 할복자살을 명받지만, 천주교신자인 탓에 자결을 거부해 효수당한다.

세계에 문 연 일본, 당쟁에 휩싸인 조선

일본이 세계와 만나며 전쟁을 준비할 때 조선은 1590년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통신사 일행 200명을 일본으로 보낸다.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토요토미의 눈빛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대비가 필요하다는 내용과 함께다. 당시 당파싸움에 휘말리던 상황에서 서인이던 정사 황윤길과 달리 동인이던 부사 김성일은 토요토미를 쥐 같은 눈을 가졌다며 무시하고, 두려워할게 없다고 말한다. 일본에 같이 다녀온 동인들도 김성일의 거짓 보고에 분노한다. 하지만, 요행을 바란 선조는 동인 김성일의 의견을 따랐다. 각 도에 명해 성 쌓기 등 전쟁대비 조치들을 중단시켰다.

▲ 김성일이 임진왜란 중 안동본가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한글 편지. 국립진주박물관 ⓒ 김문환

이뿐 만이 아니다. 선위사 오억령 파직 사건은 무능하고 안일했던 조선왕조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억령은 조선에 머무르던 일본 승려 겐소 등에게서 “일본이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 정복 준비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오억령은 이 첩보를 조정에 올린다. 일본의 거병이 확실하다는 거였다. 하지만, 조정에서 내린 답은 포상과 대비가 아니라 오억령 파직이었다.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던 일본과 정반대 조선을 비교하며 21세기 한일관계를 돌아본다.


편집 : 오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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