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망우리묘지공원

▲ 정소희 PD

산 중턱에 봄꽃이 화려하다. 꽃 잔치가 끝난 산 아래와 달리 위쪽은 만개한 벚꽃이 이제야 꽃비가 되어 흩날린다. 개나리와 진달래도 활짝 피어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다. 망우리묘지공원의 첫 인상은 희극에 가깝다.

'항일과 혁명, 문학과 예술을 꿈꾸다: 망우리 공원에 잠든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성균관대 민주동문회가 21일 개최한 답사에 동행했다. 항일운동사와 사회주의운동사를 연구한 성균관대 사학과 임경석 교수가 길잡이를 맡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잘 다루지 않은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중심으로 답사 일정을 짰다.

▲ 망우리묘지공원에 묻힌 유명인사의 묘역 안내도. 망우리 묘역의 역사를 소개한 책 <그와 나 사이를 걷다>에 실린 지도이다. © 호메로스 출판사

아들을 품은 이중섭의 묘비

임 교수는 성균관대 78학번이면서 정치학자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다 작고한 전인권 박사의 ‘이중섭론’으로 답사를 시작했다. 전 박사는 이중섭 미학을 주제로 미술평론을 써서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이라는 책을 썼다.

“전인권에 따르면 이중섭의 미술 미학을 볼 때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재가 소와 어린이였습니다. 무덤 앞 동그라미 안에 그려진 그림이 두 명의 어린이가 껴안고 있는 건데, 아들들이 노는 것을 형상화 한 거래요. 전인권은 두 가지 그림의 특성을 꼽아 이중섭 미학의 특성을 추상화했습니다.”

이중섭의 그림 세계는 역동적이면서 고독한 소의 세계와 부드럽고 따뜻한 어린이의 세계로 나뉜다고 한다. 각각 이중섭이 처한 현실과 지향하는 이상세계를 나타낸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제주도로 피난 간 이중섭은 그곳에서 ‘삶은 외롭고 슬픈 것’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삶에 관한 그의 심상은 소의 세계에서 드러나고, 강렬한 붓 터치로 표현된다. 제주도는 그에게 전쟁의 피난처였지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안정을 찾았다. 바닷가에서 노는 두 아들을 동기 삼아 이중섭은 군동화(群童畵)를 그렸다.

시대의 격랑은 천재 예술가의 삶을 흔들었다. 그림 실력을 일찍 인정받아 일본으로 유학 가 부인을 만났지만, 결혼 직후 해방을 맞아 지금 북한 지역인 원산, 제주, 거제, 통영으로 피난을 다녔다. 임 교수는 ‘북한이 고향이었던 이중섭은 45년부터 50년까지 원산에서 미술학교 교사로 근무하는데, 이 시기 무슨 활동을 했는지 미술사에 알려져 있지 않다’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초해 선전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짐작한다고 말했다. 전쟁이 계속되고 생활고가 이어지자 아내는 고향인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중섭은 1956년 홀로 사망한다.

▲ 이중섭의 묘. 오른쪽 비석 원 안에 두 아들을 형상화한 그림이 새겨져있다. © 정소희

‘홍염’처럼 문학의 불꽃을 피우고 간 최서해

‘새벽바다’(曙海)라는 이름을 가진 탓일까? 20세기 초 문단의 총아로 주목받던 최서해는 그가 쓴 소설의 제목 <홍염>처럼 강렬한 사회주의 문학의 불꽃을 피우고 요절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 계급의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동료들과 달리 최서해는 소작인 아들로 태어나 보통학교 2년 중퇴 학력뿐이다.

그는 식민지 시기 가난을 피해 북간도와 두만강변의 국경지대를 오갔고 장사와 육체노동을 하며 문학을 독학했다. 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써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로 주목받은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부장 자리에 오르지만 위장협착증으로 수술을 받다 서른둘 나이로 사망한다.

죽어서도 감춰야 했던 장덕수의 이력

일행이 다음으로 찾은 곳은 장덕수 묘소였다. 무덤 주위로 둘레돌이 둘러져 있고 봉분 앞에 석상과 큰 비석도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우리나라 1호 여성박사이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활란이 지은 비문이 적혀 있다.

▲ 장덕수 묘소 전경. © 정소희

장덕수는 국내 최초 사회주의 비밀결사 조직 고려공산당의 책임비서였다. 그는 20년대 항일운동단체이자 사회주의 운동단체인 고려공산당의 핵심인물로, 일제 초기 민족해방운동 중심이던 항일운동의 물줄기를 사회주의 운동으로 바꾼 인물이다. 고려공산당은 혁명노선에 따라 상해파와 러시아 이르쿠츠크파로 나뉘는데, 장덕수는 상해파에 속해 민족주의자와 손잡고 민족해방혁명의 성격을 띤 사회주의혁명을 이루려 했다.

그는 1922년 상해파에 반대하는 신진그룹의 공격을 받은 ‘사기공산당’ 사건으로 정계에서 축출돼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13년간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1937년 이후 일제의 총동원체제를 찬양하는 등 친일 행위에 가담한다. 이후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놓고 김구 세력과 갈등을 벌이다 한국독립당원에 암살당한다.

그의 무덤 앞에 세워진 큰 비석에는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한 이력이 적혀 있다. 임 교수는 "장덕수의 비석에는 두 개의 이력이 감춰져 있는데, 20년대 사회주의 운동 시기와 41년 이후 친일 활동 시기가 지워져 있다"고 말했다. 그의 묘소로 들어가는 입구에 놓인 돌에도 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이라고만 소개돼 있고 친일행위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 입구에 장덕수의 이념적 선언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 정소희

서정적 희곡 쓴 함세덕의 ‘오대산 빨치산가’

눈보라는 밀림에 우나 / 가슴속엔 피 끓는다 
참고 견디는 고향 마을 / 만나러 가자 출진이다
고난에 찬 산중에서도 / 승리의 날을 믿었노라 
높은 산을 넘어 넘어 / 눈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고 
빨치산이 영(嶺)을 내린다

임 교수는 함세덕이 노랫말을 붙인 ‘오대산 빨치산가 '를 들려주며 빨치산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도 실려있는 빨치산가는 전투를 앞둔 빨치산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승리를 확신하는, 구슬프고 처연한 곡이다. 비구니의 사생아로 태어난 동승의 삶을 그린 <동승>은 불과 스물다섯살에 지은 작품으로 빨치산가와는 다른 서정성이 느껴진다.

함세덕은 <에밀레종>과 <황해>를 쓰며 일제를 선전하지만 해방 이후 자신의 친일 행적을 반성하고 <기미년 3월 1일>과 같은 작품을 남긴다. 임 교수는 "함세덕이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취재 노트를 썼는데, 개인적으로는 3∙1운동의 실체와 가장 가까운 기록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3∙1운동 민족대표와 학생단 조직 과정은 일본 경찰 문서나 판결문에 남아있는데, 체포된 사람들 진술이므로 역사적 진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반면 함세덕의 기록은 해방 이후 폭넓은 증언을 반영한 것이라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주의자, 우파정치인, 평화통일가 조봉암

“누구나 그렇지만 조봉암은 인생의 굴곡이 있는 사람입니다. 생애 처음과 마지막은 역사에 큰 기여를 했고 우리 삶과 공동체에 잊을 수 없는 역할을 했지만 생애 가운데 부분은 아쉽고 오류가 많다 생각합니다.”

▲ 사형당한 조봉암의 무덤 앞에 누가 막걸리 한 병과 컵을 올려놓았다. © 정소희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상징하는 조봉암 묘소 앞에서 임 교수는 그의 생을 위와 같이 축약했다. 조봉암은 초기 사회주의운동을 이끌었고, 상해파였던 장덕수와 달리 화요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특히 외교 능력이 출중했다. 1925년 서울에서 독립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중립당)을 대표해 모스크바에 다녀온 뒤 조선공산당을 국제공산당에 가입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32년 상해에서 체포되고 39년 출옥한 뒤 전시체제에서 쌀 배급과 관련한 이권을 챙겨 사회운동과 멀어진다. 해방후 박헌영 노선의 조선공산당에 반대한 조봉암은 미국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 미군방첩부대)와 연계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결과적으로 공산당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여론전을 편다. 이후 이승만 정부의 농림부장관으로 입각하나 말년에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평화통일론을 주장한다. 재야정치가로 반독재운동을 주도하다 진보당 사건으로 국가폭력에 희생된다. 생전에 ‘대나무 숲(竹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도 담담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김사국과 박원희, 시대의 맨 앞에 선 부부운동가

마지막 답사지는 김사국과 박원희의 묘소였다. 김사국은 장덕수나 조봉암과 마찬가지로 초기 사회주의운동을 이끈 인물로 서울파에 속한다. 박원희는 영어교사이며 사회주의 여성단체를 창립한 지식인이다. 둘의 결혼이 신문에 실릴 정도로 ‘조선의 유망한 젊은 지식인 부부’로 알려졌다.

김사국과 박원희는 북간도 용정의 동양학원에서 급진적 학생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둘은 일제에 체포되고, 해외망명생활을 하다 건강을 잃는다. 1926년 김사국은 폐결핵으로 서른다섯에 사망하고, 1년 뒤인 1927년에 박원희도 서른한살에 세상을 뜬다.

김사국의 동생인 김사민도 사회운동가였는데,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인 신생활사 사건에 연루돼 징역형을 받았다. 기질이 셌던 김사민은 일본인 간수와 다투다 엄한 고문을 받고 정신이 파괴되어 힘든 삶을 살았다. 김사국과 박원희의 묘는 2002년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돼 현재 망우리에 남은 봉분은 김사국의 어머니인 안국당의 묘다. 모서리가 조금씩 깨진 부부의 묘비가 안국당의 봉분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 왼쪽 아래에 김사국의 묘비가 묻혀있다. 김사국의 묘비에는 ‘사회운동선구자’, 박원희의 묘비에는 ‘여성운동선구자’라고 새겨져있다. © 정소희

시대에 맞서거나 소외된 이들의 안식처

현재 서울시내 유일한 공동묘지인 망우리묘지공원은 공동묘지가 으레 그렇듯 서민들이 묻히는 곳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이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며 인구가 빠르게 늘고 물려받은 땅이 없는 이들은 묘터를 찾아 망우리로 모였다. 이렇듯 서민들이 많이 묻힌 곳이었으나, 가난한 독립운동가나 예술가 등 유명인사도 많이 묻혀 죽음 앞에 평등이 실천된 곳이기도 하다. 1973년 2만8천500기에 이르던 분묘가 지금은 대부분 이장되어 7천여기만 남았으나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은 여전히 이 곳에 남아있다.

망우리(忘憂里)라는 지명은 원래 이성계가 동구릉 일대를 답사하고 자신의 능지로 삼은 뒤 돌아오는 길에 '근심을 잊었다' 하여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망우리묘지공원은 비극으로 다가온다. 시대의 비극에 맞서거나, 시대로부터 소외된 슬픈 개인사를 가진 이들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운동한 이도 많았지만 삶의 궤적은 저마다 달랐다. 공통점이라면 ‘꿈’을 갖고 살았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지자체에서 분묘 이전을 장려해 공원 기능을 활성화하는 추세다. 소나무와 산벚나무가 꾸준히 늘었고 체육시설이 생기기도 했으며 길도 정비됐다.

망우리묘지공원은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내려오게 된다. 거기 묻힌 이들이 못다 이룬 비원(悲願)을 저마다 마음 속에 담고 나오기 때문일까? 살아생전에 죽은 이들의 터전에 들러보면 한없이 가벼운 내 삶의 무게를 달아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망우리묘지공원의 벚나무들은 해마다 죽은 이들을 위해 연분홍 꽃비를 뿌린다. © 정소희

편집 : 양안선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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