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남북미협상’

▲ 홍석희 기자

‘뺨을 스치는 어느 저녁에 그 공기 속에도,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니가 있어.’ 밴드 넬의 대표곡 ‘기억을 걷는 시간’ 중 일부로, 헤어진 연인과 보낸 시간을 회상하는 노래다. 팬들 사이에 기억을 ‘걸어가는’ 시간인지, 기억을 ‘걷어내는’ 시간인지 의견이 엇갈렸다. 영어 제목이 ‘Time Walking On Memory’로 알려지며 논란은 종결됐다. 그러나 팬들은 원작자의 문학성에 감탄했고, 누군가는 기억을 ‘걷어내는’ 시간으로 마음에 담아뒀을 것이다.

헤어진 연인 사이에도 서로를 걷어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75년간 서로 불신해온 둘이라면 어떨까? 그 불신은 이별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어서, 서로 죽이고 파멸로 치달았다. 이해관계자가 많아서 일방적으로 잊을 수도 없다. 남과 북이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터널에 서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2차 북미회담 결렬을 두고 힐난이 쏟아졌다. <조선일보>는 지난 1일 ‘최소한 지금 김정은은 핵을 포기할 뜻이 없고 '비핵화'는 가짜다’라는 사설에서 ‘(북한이) 비핵화하는 척 시간을 무한정 끌면서 제재만 무너뜨리려는 것이다’라며 ‘지금으로서는 김정은을 그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갈 유일한 방법은 대북 제재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자유한국당 유기준 의원은 지난달 20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북한의 위장평화쇼에 취해 미북회담이 결렬로 끝났다”며 “총체적인 외교안보의 무능이 드러나고 있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내 정치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러시아 간 유착 의혹인 ‘러시아 스캔들’ 조사 결과는 트럼프에게 유리하게 발표됐지만 ‘장벽 예산’은 통과되지 않았고 지지율도 40% 대 초반을 맴돈다. 국내 정치에서 코너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은 외교 성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성급하게 비핵화를 이끌어 내든지 대북 강경파에 힘을 실어 주든지, 무리수를 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대북제재로 압박을 받고 있다. 북한 리용호 외무상은 지난 1일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고 요청했다. 선택적 해제를 요구할 만큼 북한 경제 상황은 여의치 않다. 대북제재 수위가 높아질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트럼프의 취소로 현상유지는 되고 있다.

▲ 남북미 관계가 중대기로에 놓인 상황에서 오는 11일 한미정상회담이 열린다. '중재자' 문재인 대통령이 어떤 셈법으로 북미 대화를 유지시킬지 귀추가 주목된다. ⓒ KBS

‘중재자’ 문재인 대통령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미국과 북한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지금, 대화 창구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 임무다. 지난달 21일 댄 코츠 미 국가정보국 국장이 비공개로 방한해 문재인 대통령과 공조 방안을 논의했다. 한미 공조는 긴밀히 이루어지는 모양새다. 반면 북한은 22일 개성 연락사무소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했다가 일부만 복귀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다시 추진하는 등 획기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필요하면 열 번이라도 더 만나야 한다.

한미정상회담을 앞둔 문재인 대통령은 조급해지면 안 된다. 2차 남북정상회담 결과 발표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산의 정상이 보일 때부터 한 걸음 한 걸음이 더욱 힘들어지듯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완전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협상 결렬에도 웃으며 헤어졌다. 몇 번 만나면 당장이라도 통일될 것처럼 떠벌리다가, 기다렸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곳은 언제나 같다. 75년 역사에서 그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수십 번 더 아쉽고 안타깝고 유감스럽더라도, 그럼에도 믿고 가야 한다, 누구도 걷지 못한 시간을 걷고 있기에.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정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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