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수상작/첨삭후기

[제시어] ‘연결’

[우수작]
김금이 (고려대 정치외교학): 세상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박선영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혐오사회로 가는 징검다리
배지현 (고려대 불어불문학): 잘못된 ‘커넥션’과 새로운 ‘만남’
백지호 (부산대 컴퓨터공학): 일제 강점기와 우리의 강점기
이신의 (전남대 신문방송학, 저널리즘스쿨 입학): 고립된 이들의 연결망
조현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연대’를 꺼리는 이유도 절박하다
최유진 (숙명여대 한국어문학, 저널리즘스쿨 입학): 현대판 ‘처용’이 되어봐?

18기 대학언론인 캠프가 끝나고 두 달이 지나 수상작을 발표하게 돼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진작 첨삭을 해뒀지만 지난 학기 수업의 결과물과 시의성에 쫓기는 기사들을 내보내느라 발표가 늦었습니다.

▲ 18기 대학언론인 캠프 참가자들이 강연에 열중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13개 강좌에 참여하고 귀가한 뒤 온라인으로 글쓰기 과제를 제출해 첨삭을 받았다. ⓒ 임지윤

수상자는 주소를 내 메일(hibongsoo@hotmail.com)로 알려주면 약속대로 인터넷서점에서 내 책 <중립에 기어를 넣고는 달릴 수 없다>를 구입해 부치겠습니다. 수상작은 <단비뉴스>에 첨삭본과 함께 실을 예정이고 수상하지 못한 글은 첨삭본을 필자에게 바로 보내겠습니다. 실은 저널리즘스쿨 졸업생인 조은비와 재학생인 이자영의 글도 상을 받기에 충분하지만 상당기간 훈련받은 저널리즘스쿨 출신은 ‘불공정경쟁자’일 수도 있어 수상자를 줄였는데, <단비>에는 실을 예정입니다.

응모작들 평가는 첨삭된 내용으로 대신하고, 이번 백일장 첨삭후기로는 남의 생각을 도용하는 표절 문제를 고민해보겠습니다. 글쓰기는 표절과 창작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허난설헌 같은 탁월한 시인과 황석영 천운영 같은 소설가, 그리고 아이돌 가수의 작곡가가 표절 시비에 휘말린 것도 좋게 봐주면 줄타기에서 한두 번 삐끗한 게 아니겠습니까? 다만 허난설헌은 본인 탓이 아니죠. 동생 허균이 요절한 누나를 가엾게 여겨 발간한 유고집에 남의 시를 집어넣은 거니까요.

13회에 이른 이 백일장에서도 명백하게 표절은 아니지만 남의 생각을 옮겨놓았을 뿐 자기 생각이 거의 없는 글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면 독창적인 글쓰기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학자와 예술가도 그렇지만 언론인은 특히 마감시간에 쫓기는 직업이어서 표절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른 신문 사설을 일부 베꼈다가 징계를 받고 퇴사한 논설위원도 있었습니다.


칼럼은 표절 아니면 혁명이다

이 글의 제목도 표절에 가깝지만 완전한 표절은 아니다. 화가 폴 고갱이 한 말은 “예술은 표절 아니면 혁명이다”였으니 주어가 다르다. 고갱은 남태평양 타히티 원주민의 인간성과 열대의 강렬한 색채에 매료돼 그곳에 살면서 가히 혁명적인 작품세계를 펼쳤는데, 그의 말은 체험적 예술론이라 할만하다. 미술에 문외한인 나는 그가 말한 표절의 의미를 잘 모르지만, ‘창작은 모방으로 시작된다’는 함의도 있을 거라 짐작해본다. 따지고 보면 모든 예술은 자연의 표절이니까.

▲ 폴 고갱, ‘아레아레아’(기쁨). © 오르세미술관

알다시피 ‘표절’은 영어로 ‘plagiarism’인데, 라틴어 ‘plagiarius’ 곧 ‘아기유괴범’에서 유래했다. 표절은 각고 끝에 나온 남의 학문적, 예술적 소산, 곧 ‘정신적 자식’을 훔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40대 후반에 시작한 런던대 유학시절 기성 미디어 이론에 치어 논문이 난관에 부닥치면 지도교수이자 세계적 석학인 제임스 커런(James Curran)은 “이건 당신 아이야”(This is your baby)란 말을 자주 했다.

미디어가 수용자에게 미치는 효과가 크니 작니 하면서 논란을 벌인 미디어 효과이론은 중간쯤 되는 제한적 효과이론으로 수렴됐지만, 내 논문은 미디어가 경제변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며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1997년 한국 외환위기는 언론이 주범 중 하나였다는 게 논문 주제다. 커런 교수의 조언은 기존 이론에 얽매이지 말고 자기 생각을 과감히 쓰라는 거였다. 물론 논증이 뒷받침돼야 하지만.

그 논문도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수많은 학자들의 업적 위에 그야말로 조그만 돌 하나 얹은 것에 불과하다. 위대한 ‘생각의 선구자’ 아이작 뉴튼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있었기 때문이다.”(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금언이 되다시피 한 뉴튼의 이 말도 표절이다. 중세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가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뉴튼 같은 대단한 학자가 약간 가공해서 말하자 그의 말로 알려지게 됐다.

실은 베르나르도 서양문화의 발원지인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신화에 따르면 키오스 섬의 왕에게 눈을 빼앗긴 거인 오리온(Orion)은 어깨에 올라탄 난쟁이 케달리온(Cedalion) 덕분에 길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서사는 동서양에 수없이 등장한다. ‘You raise me up’을 부른 웨스트라이프(Westlife)도 ‘너의 어깨 위에 있을 때, 나는 강하다’(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고 노래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창작은 표절에서 약간 벗어난 모방으로 출발한다는 점이다. 모방도 쉬운 게 아니다. 들은 게 없고 본 게 없고 느낀 게 없으면 무엇을 모방할 것인가? 여행 같은 직접경험과 독서 같은 간접경험이 없으면 모방하려 해도 할 게 없다. 좋은 칼럼도 취재와 미디어 모니터링, 그리고 책 읽기에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

우리나라 신문 사설을 무턱대고 필사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사설은 대개 이미 나온 스트레이트 기사를 늘어놓은 뒤 ‘그러면 안 된다’고 일갈하는 구조로 돼있다. 무기명에 무성의가 더해지는 것이다. 필사는 생각을 옥죄는 틀이 되거나, 머리 속에 잠재해 있다가 글로 표출돼 본의 아니게 표절로 비난받을 수도 있다.

천운영 작가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바늘>이 문단의 찬사를 받았지만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표절한 사실이 밝혀져 심사위원과 함께 망신을 당했다. 그는 “습작 시절 필사를 하곤 했는데 문장에서 그런 부분들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났다”고 말했다.

표절과 창작 사이를 줄타기 하는 건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숙명이라 할 수 있다. 직간접경험이 풍부하면 표절의 유혹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할 수 있다. 독창적 글쓰기를 위한 개인 DB 만들기와 글쓰기 기법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쓰겠다.

이봉수 교수


편집 : 황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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