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독립지사 김규식 손녀 김수옥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죠. 두 번째 만났는데 앞으로 또 만날 수도 있고요. 이렇게 만나면서 안 맞는 것도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거니까.”

28일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베트남 ‘하노이 선언’ 불발 뒤, 독립지사 김규식 박사의 손녀 김수옥(76) 우사김규식연구회 회장이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밝힌 말이다. 비록 두 정상이 절대다수 국민의 기대와 달리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하노이 선언’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김 회장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규식 박사는 ‘한반도 비핵화’만큼이나 실타래가 꼬였던 해방정국에서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하며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첫 기회”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는데 김수옥 회장 역시 김규식 박사 후손다웠다.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날, 3·1운동 100주년을 하루 앞두고 ‘남북협상’의 산파역인 김규식 박사의 손녀 김수옥 회장을 긴급 인터뷰했다. ‘맑음’이 예보되다가 갑자기 ‘먹구름’으로 바뀐 한반도 상황에서 남북대결과 전쟁을 극복하고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물었다.

“만나자마자 잘되면 그게 이상한 것”

“개인도 만나다 보면 안 맞을 수 있는데, 더군다나 나라 운명이 달린 일에 만나자마자 일이 척척 진행되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꼭 들어맞는 회담이었다. 28일 오전까지만 해도 ‘하노이 선언’에 담길 빅딜의 내용이 무엇일지 전 세계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은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예정됐던 두 정상의 오찬 모임이 취소되고,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4시에서 2시로 앞당긴다는 백악관 발표가 나오면서 불길한 예감이 감돌았다. 강경파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등장하면서 싹튼 ‘혹시나’하는 불안감이 ‘역시나’로 바뀌었다. 마침내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빈손으로 회담장을 떠났다.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 경제협력에 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화해와 협력보다 갈등과 분열 속에서 이득을 취하는 세력만 표정관리 속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33년 넘게 해외로 떠돌며 조국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지사 후손의 내공은 달랐다. 그 오랜 시간 오직 ‘독립’이라는 한줄기 희망의 빛을 부여잡고 투쟁하며 인고의 시간을 견뎌온 할아버지 김규식의 얼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음이 틀림없다.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았다.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기자의 소감 질문에 독립지사의 손녀는 만나자마자 일이 척척 진행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며 너털웃음까지 터트렸다. 회담결렬 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이 인터넷판에서 전한 ‘성과는 없지만, 갈등이 증폭될 가능성은 작다’는 분석이 유효하다면, 김 회장의 너털웃음에 담긴 의미가 분명해진다. 더 만나면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충고다.

“북한이나 미국이 대화하려 하고... 그게 중요”

“북한이나 미국이나 서로 대화하려고 하고. 북한도 어쨌든 밖으로 나왔잖아요. 그것 자체가 중요한 거잖아요.”

▲ 처음부터 잘되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면서 북한과 미국이 대화하려는 노력 자체가 중요하다고 희망을 놓지 않는 김수옥 회장. ⓒ 윤종훈

북한이나 미국이 대화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김 회장의 평가는 우리에게 북미 정상회담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높이를 설정해준다. 그동안 우리가 비핵화와 평화번영이라는 공동의 목표 달성에 조급해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은 게 아니냐는 반성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3년을 총부리 겨누고 싸우고도 56년째 대결 상태에 있는 남북미의 만남 자체에 일단 높은 점수를 주겠다는 태도다.

28일 오전 11시(베트남 현지시간)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서 북미정상 확대회담 시작 직전 “비핵화 준비가 돼 있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김정은 위원장은 “그런 의지가 없었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기자들 현장 질문에 답한 것도 달라진 모습이지만, 기차를 타고 무려 66시간을 달려온 속내는 그만큼 대화를 통한 한반도 갈등 해결에 적극적이라는 의미다. 김 회장은 이 대목을 꿰뚫어 본 거다.

회담 결렬 뒤, 1일 새벽 0시 10분쯤 북한 이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부상은 숙소인 하노이 멜리아 호텔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이 자리에서 최선희 부상은 “민생∙민수용 제재 해제도 어렵다는 미국 반응을 보며 김정은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의욕을 잃지 않으시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대화 의욕을 꺾지 않고, 대화 동력을 살려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 대통령 하시는 일에 할아버지 생각나”

“최근 문재인 대통령 하시는 걸 보면 할아버지 생각나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할아버지는 분단만은 막아야겠다는 일념이었어요.”

김 회장의 말에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이 돋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28일 저녁 하노이를 떠나면서 외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25분 남짓 통화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에게 “김정은과 대화하고 그 결과를 알려달라”고 주문했다는 게 청와대 설명이다. 트럼프가 개인변호사이자 측근이었던 마이클 코언의 의회 증언이라는 국내 정치현안에 ‘내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대화를 통한 비핵화와 제재 해제라는 판을 지속시키려는 의지를 분명히 내보인 것이다. 문 대통령의 구원등판, 곧 주도적인 중재 역할에 다시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한반도 운전대론을 내세우며 적극적 역할을 주창해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5일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한반도 주인은 우리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와도 언제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어려운 짐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우리 민족끼리 먼저 대화해보자는 ‘남북협상’ 주창자 김규식 박사의 철학과 비슷하다는 게 김 회장의 판단이다.

“당시 미국, 소련과 같은 강대국들이 옆에서 갈라놓는다고 해서 남이 정해준 대로 ‘남한은 남한, 북한은 북한’이 아니라는 거죠. 남북협상 당시 우리 민족끼리 대화를 나눈 것처럼 분단만은 막고자 했던 할아버지의 정신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트럼프가 중재 부탁한 지금이 남북대화 적기”

“전 세계적으로 분단된 나라가 우리나라밖에 안 남았잖아요. 같은 민족이니까 사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예요. (북한과) 대화를 하는 건 맞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는 ‘남의 장단(강대국)에 춤을 추지 말고 우리(남북) 장단에 춤을 추자’고 말씀하셨거든요.”

이런 김규식의 소신은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를 내지 못한 이 시점에 더욱 빛나 보인다. 북한이 미국과 협의를 이루지 못했다면, 미국 대통령이 우리에게 중재를 부탁하는 상황이라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북한과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는 게 중요하다. 남한 단독정부는 분단으로, 분단은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걸 예견했던 김규식 박사의 통찰은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아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북한과 대화 단절은 갈등으로, 갈등은 핵문제 악화와 전쟁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를 막을 방법을 김 회장은 김규식의 ‘통일한국’, ‘남북협상’ 정신에서 찾는다.

“할아버지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분단이 확고하게 되니까 오직 통일 정부를 우선으로 생각하셨어요. 단독정부가 수립될 당시 처음 미국군정청은 할아버지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대통령 될 마음 없다’, ‘단독정부는 안 된다’, ‘38선 팻말 뽑아버려야 한다’며 통일된 단독 한국만을 소망하셨지요.”

▲ 1946년 미군정 시기의 김규식 박사. ⓒ 위키피디아

“교육의 장으로 삼청장 복원했으면”

화제를 ‘남북협상’의 산실이던 서울 종로구 삼청장으로 돌렸다. <단비뉴스>가 지난 24일 보도한 ‘남북협상 산실 복원, 청와대는 뭐하나’ 기사와 관련해서다.

“사실은 삼청장, 그 말 한마디에 나올 생각을 한 거예요.”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바깥출입을 자제하던 김수옥 회장이 <단비뉴스> 인터뷰 요청에 응해준 이유를 직설적으로 들려줬다. 인터뷰에 응할 결심을 할 만큼 관심을 두는 삼청장의 의미를 김 회장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삼청장은) 문화재로서 역사적으로 보나 교육적으로 보나 가치 있는 우리 근·현대사의 핵심 건물이거든요. 남북협상 하기 이전에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주요 인사들이 삼청장에 다 모여서 결정한 걸 북한에 서한으로 보내고요. 말 그대로 남북협상의 산실이에요.”

그가 회장으로 있는 우사김규식연구회는 이미 지난 1월 삼청장을 독립과 좌우합작, 통일정신의 교육장으로 복원해야 한다며 청와대와 총리실, 보훈처에 탄원서를 냈다.

“(삼청장을) 개인이나 나한테 돌려달라는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힘겹게 독립했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랐으며,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 걸 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문화재와 교육의 장으로 삼청장을 복원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어요.”

“사학자들도 모르는 삼청장”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학자들도 (삼청장) 얘기를 하면 잘 몰라요. 깜짝 놀라서 듣고 그래요. 지난해 9월에 이낙연 총리가 3·1위원들을 공관에 초대해서 만찬을 한 적이 있어요. 저도 민간위원 자격으로 있었고요. 이낙연 총리께서 그 자리에서 삼청장을 소개해주셨거든요. (삼청장을) 기념관으로 쓸 수 있게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추진위에 안건을 올리라고 총리께서 말씀도 하셨고요.

김 회장은 삼청장 얘기가 나오자 뭔가 북받치는 듯 말을 잇는다.

“지난해 8월 KBS ‘도전 골든벨’에서 이승만의 이화장, 김규식의 삼청장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나왔어요.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그런 문제를 낸다는 건 삼청장이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공간이라는 사실인데 할아버지 장소만 대통령 경호실이 쓴다는 건 모순이에요.”

“복원 어렵다”는 정부, 기념관은 지을 수 있어

“우리 때는 먹고 사는 거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지만, 요새 젊은이들은 꿈도 많고 그 꿈을 펼칠 기회가 많아요. (삼청장을) 젊은 사람들이 꿈을 꿀 수 있는 장소로 제공해서 너무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젊은이들이 우리 역사에 자긍심을 기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삼청장 원형이 남아 있지 않아 복원이 어렵다는 정부의 공식 견해는 궁색하다. 경복궁 남문인 광화문을 복원할 때 원형이 있어서 복원한 게 아니다. 사진을 보고 복원한 거다. 경복궁 복원사업을 추진한다지만, 경복궁이야말로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아무것도 없던 터에 1868년 흥선대원군이 복원한 거다. 이마저 일제가 헐어낸 것을 현재 원형도 없이 복원중이다.

단순히 독립지사가 살던 사저의 개념이 아니다. 민족분단을 막고 남북협상을 추진하던 산실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보인다. 굳이 복원이 아니어도 독립정신과 남북협상 정신을 기릴 기념관은 얼마든지 지을 수 있다. 효창공원 백범기념관이나 남산 안중근기념관, 양재 시민의 숲 윤봉길기념관은 독립지사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인데도 기념관을 지어 숭고한 뜻을 후대에 기린다. 김 회장의 다음 말을 들으며 화제를 독립운동 시기로 돌렸다.

“청와대가 삼청장 문화재 복원 사업에 나설 때까지 계속해서 탄원서를 낼 거예요.”

“8개 국어 하며 강의로 돈 벌어 독립자금”

“8개 국어를 하셨는데 프랑스 교수한테는 프랑스어로, 독일 교수한테는 독일어로 한국을 소개하고요. 박학다식하면서 위트도 있어서 좌중을 압도했다고 하더라고요. 말에서는 지지 않았다고 해요.”

김규식 박사의 외국어 실력은 정평이 나 있다. 언더우드 목사의 도움으로 떠난 미국 유학 시절 학업성적도 좋았지만, 영어와 프랑스어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니,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다른 독립지사들과 달리 중국 대학에서 영문과 교수 등으로 취직해 돈을 벌 수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중국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번 돈이 모이면 독립자금으로 쓰셨거든요. 그렇게 당신은 돈을 벌면서도 구멍 난 양말을 신었다고 하더라고요. 옛날 양말은 요새처럼 질기지 않거든요. 당신을 위해 돈을 쓰시진 않았던 것 같아요.”

“호치민에게 독립의 꿈 안겨준 파리강화회의 활동”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에 갔을 때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거 알고 가셨잖아요. 이루어질 거라고 간 게 아니라요. 할아버지가 당시 38살로 젊었거든요.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가신 거죠. 그런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게 자랑스럽고 자긍심이 있어요.”

파리강화회의 100주년을 맞아 김 회장은 당시 신한청년단 대표로 나중에 임시정부 대표로 독립외교활동을 펼치던 김규식 박사 관련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재불사학자 이장규 씨가 베트남의 국부로 불리는 호치민이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파리 활동에 깊이 감화했다는 기록을 프랑스 국립해외영토자료관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 우사 김규식(앞줄 왼쪽 두 번째) 박사가 손녀 김수옥 회장을 안고 찍은 가족 사진. ⓒ 김수옥

“호치민도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운동은 꿈도 못 꾸고 자기 나라 사람들 처우 개선만 생각했다고 들었어요. 호치민이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독립을 꿈꿨다고 해요. 그런 정신을 파리강화회의에서 외국 사람들에게 전할 만큼 독립하겠다는 의식이 강했던 거죠.”

“고난 속에도 변절 안 한 독립운동 외길”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과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맡았던 김규식 박사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 달 넘는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영하 20도를 넘는 혹한 속에 혹시 밀정에게 붙잡힐까 봐 기차를 갈아타며 칼을 숨긴 채 노숙하는 고된 여정을 이겨냈다. 상해, 중경 등에서 이어진 독립운동 시기 일제 군경은 물론 이들에게 포섭된 한국 출신 밀정들의 체포 공작에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서 30년 넘게 망명생활 하셨을 때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살았는데요. 정상적인 생활을 못 했대요. 항상 보초를 세워놓고 이상한 사람들이 기웃거리면 휘파람이나 암호 같은 거로 신호 보내서 도망가고...”

김 회장은 탄압과 함께 회유를 이겨내는 것도 독립운동과정에 극복해야 할 숙제였다고 들려준다.

“요새 잣대로 보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나라사랑 정신이 강하셨죠. 할아버지가 친일파가 될 수도 있었어요. 유혹도 많았고 일본에서 교수직도 제의받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관대작으로 편하게 살 수 있었어요. 그걸 다 뿌리치셨어요. 경신학교나 새문안교회에서 학생들 가르치고. 깨어나야 남한테 무시 안 당하니까 교육에 열정적이셨거든요.”

우리 민족을 탄압했던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우경화의 길로 치닫는 데 대해 김 회장은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놓는다.

“개인적으로 일본 사람들을 만나면 친절해요. 그런데, 일본 젊은이들은 일제 만행의 실상을 교육을 받지 않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독일의 경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을 영화나 매체에서 소개해줘서 잘 알고 있는 것과 다르지요.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이 됐는데도 일제청산이 안 되고... 우리는 ‘사과하라’, 일본은 ‘못 한다’, 계속 공전만 하고 있어 안타까워요.”

“후손이 아닌 나라에서 먼저 해야 할 일”

북한 애국열사릉에는 6·25 때 납북돼 숨진 김규식 박사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김 회장은 지난해 4월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남북이 화해 분위기로 갈 때 한 가지 꿈을 키웠다. 할아버지 묘소 참배를 넘어 서울로 이장하는 희망이다. 김 회장은 지난주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내고 남북협상 운동을 함께 펼치다 6·25 때 납북돼 숨진 독립지사 김붕준 선생의 손자를 만나 정부에 청원을 넣기로 뜻을 모았다. 기약 없는 이들의 희망 속에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 남북 협상 71주년의 요란한 기념행사에 가려진 대한민국의 민낯이 보인다.

“현충원에 위패가 있는데 30년 넘게 조국을 위해 외지를 떠돌던 업적을 생각하면 초라해 보여요. 묘를 이장하는 문제는 추후 국가가 나서기 전까지 개인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 같고요, 김붕준 선생의 손자와 함께 가묘라도 해주길 바란다는 입장을 모았어요. 삼청장 복원도 후손이 나설 일이 아니라 나라에서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편집 : 최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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