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김규식의 삼청장

▲ 윤종훈 기자

“우리 장단에 맞춰 춤을 추어야 하겠다. 좌우합작도 미국 사람 장단에 춤추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남의 장단이 아니라 우리 장단에 춤추는 것이 제일이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을 막고자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찾은 우사 김규식 박사가 백범 김구와 김일성 앞에서 한 말이다. 칠십 평생을 좌우합작을 통한 조국독립운동,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헌신한 김규식의 삶이 새롭게 조명된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남북협상 71주년을 맞아 그의 정신을 되살릴 엄중한 과제가 우리 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27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을 한다. 결과에 따라 남북정상회담과 남북협력이 물꼬를 틀 가능성도 크다. 김구 주석과 쌍두마차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던 부주석 김규식이 해방 뒤 환국해 6·25때 납북될 때까지 5년 동안 머문 삼청장(三淸莊). 1948년 남북협상의 산실이던 역사 현장 삼청장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과 함께 보존∙복원 문제를 짚어봤다.

갈 수 없는 곳, 남북협상의 산실 삼청장

광화문 동쪽 동십자각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틀어 경복궁 건춘문을 지나면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에 이른다. 여기서 맞은 편 삼청파출소 방면 2시 방향으로 우회전해 직진하면 북촌 한옥마을 끝자락에 삼청동 주민센터가 나온다. 여기서 100여m쯤 떨어진 왼쪽 언덕바지로 올라가려 하자 건장한 남자들이 가로막는다. 청와대 경호원들이다. “더 이상 가실 수 없습니다.” 경호원들이 갈 수 없다고 막는 주소는 삼청동 145-20번지, 삼청장 터다.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 12월 장덕수 암살을 거치면서 이승만 중심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세력이 움직일 수 없는 대세로 굳어진다.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과 전쟁으로 비화할 것을 우려한 김규식은 단정 수립과 분단 반대를 위한 남북협상을 1948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내세운다. 김규식은 임시정부를 함께 이끌던 김구와 1948년 2월 4일 삼청장에서 역사적으로 손을 잡는다. 사상의 차이를 딛고 임시정부에서 펼치던 좌우합작 독립운동 정신을 통일운동에 다시 한번 되살리기로 뜻을 모은다. 김규식과 김구는 남북지도자회담을 갖자고 김일성과 연안파 김두봉에게 서한을 보낸다.

1. 독재정치제도를 배격할 것
2.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수립할 것
3. 전국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4. 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말 것
5. 미·소 양군의 철수를 공포할 것

5개 조항을 김일성이 수락하자 김규식은 1948년 4월 19일 삼팔선을 넘어 4월21일 평양에 입성한다.

고아 김규식, 언더우드 도움으로 공부한 뒤 독립투사로

김규식은 경상남도 동래부 종사관이던 일본 유학 출신 관리 김지성의 둘째 아들로 1881년 1월 29일 태어난다. 아버지가 민씨 정권의 무능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유배돼 죽으면서 고아가 돼 숙부 손에 맡겨진다. 6살 고아 김규식은 죽음의 문턱에서 1886년 선교사 언더우드의 눈에 띈다. 언더우드의 주선으로 1897년부터 미국 버지니아주 로녹 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1904년부터 언더우드의 비서,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일한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김규식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1918년 8월 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당을 결성하면서다. 1918년 11월 11일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승전 주역인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신한독립당은 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고 외교활동 전략을 세운다. 1918년 11월 28일 영어∙불어는 물론 8개 국어를 구사했다는 김규식을 단장으로 대표단을 파리 베르사이유 1차세계대전 강화회의에 파견한다.

▲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앞줄 오른쪽 첫 번째). ⓒ 독립기념관

김규식이 파리에 가 있는 동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을 향한 민족의 뜨거운 열망이 표출되고 이를 기반으로 1919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들어선다. 임시정부는 김규식의 신한독립당 대표단을 임시정부 공식대표단으로 임명한다. 김규식은 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격을 높여 열성적인 활동을 펼치지만, 일본의 방해와 승전국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비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1919년 8월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돼 미국으로 가 미국의회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치는 한편, 동포들로부터 독립자금을 모아 1921년 1월 상해 임시정부로 돌아온다.

임시정부 독립운동에서도 좌우합작 주도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미국에 실망한 김규식은 사상적으로 진보 노선을 걷는다. 아울러 강대국 외교를 통한 독립청원의 한계를 깨닫고 무장독립투쟁에도 적극 힘을 보탠다. 약산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 활동을 돕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남경 중앙군관학교에서 한국인 교관으로 무장 독립운동가들을 기른다.

▲ 1943년 중경 임시정부 시절 김규식(왼쪽). ⓒ 위키피디아

김규식이 독립운동 과정에서 일관되게 견지한 태도는 두 가지다. 여러 차례 탈퇴하긴 했지만 결국 임시정부에 재입각해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킨 점과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모은 통일전선수립이다. 김규식은 이런 원칙에 따라 진보적 독립운동세력이 1935년 7월 결성한 조선민족혁명당의 주석을 맡는다. 이어 독립운동세력 통합을 권고한 중국 국민당정부 충고를 받아들여 1939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고 임시정부에 다시 들어가 김구와 손잡으며 좌우합작을 이뤄낸다. 1942년에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편입해 임시정부의 군사기능을 강화한다.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김규식은 광복 뒤 1945년 11월 23일 김구와 함께 환국해 삼청장에 자리 잡는다.

좌우합작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 남북협상

해방공간에서도 김규식의 활동은 좌우합작에 모아진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로 1946년 출범한 미소공동윈원회가 신탁통치 반대 단체 배제를 놓고 공전을 거듭하다 1947년 5월 최종 결렬된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해 분단이 점점 현실화한다. 이를 막기 위해 김규식은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으로 독립운동의 뿌리를 함께 내린 여운형과 1946년부터 좌우합작운동에 불을 지핀다.

▲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 귀국 장면. 김구 오른쪽이 김규식과 조소앙. 김구 왼쪽 한복 입은 이는 이시영. ⓒ 위키피디아
▲ 1946년 좌우합작위원회. 가운데가 김규식이고 오른쪽은 김붕준과 안재홍. ⓒ 위키피디아

하지만, 과거 동지였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심화하면서 미군정 방침이 좌익탄압으로 기울자 좌우합작운동도 점차 설 자리를 잃는다. 가장 합리적인 지도자로 꼽히던 김규식의 활동반경이 그만큼 줄어드는 가운데 1948년 1월 유엔 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일정이 진행된다. 김규식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면서 김구와 손잡고 남북협상의 물꼬를 튼다.

남북협상 실패하면 ‘동족상잔 비극’ 예견

“친일파, 민족반역자, 자본가들 이익을 테러로 옹호하고, 극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권이라도 세워보자는 가공∙가증의 음모이다. 우리 민족은 통일된 정부를 세워서 공존번영을 누리느냐, 분열된 전제정치를 세워 상잔상학(相殘相虐)의 비운에 빠지느냐의 가장 위험한 기로에 서있다.”

남한 단독정부 세력에게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추진하면서 던진 메시지다. 요즘도 귀에 쩌렁쩌렁 울리는 경구다. 하지만, 김규식과 김구가 일말의 기대를 건 남북협상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김규식은 1948년 5월 5일 서울로 돌아온다.

▲ 남북협상 기간 평양 을밀대에서 김규식(왼쪽 두번째)과 김구(오른쪽 두번째). ⓒ 위키피디아

김규식과 김구는 5월 10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실시된 대한민국 제1회 총선거에 나서지 않는다. 5·10 총선거 결과로 생긴 200석 대한민국 초대 국회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뽑힌다. 이승만의 단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주축이 된 국회에서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예견된 일이었다. 이승만 지지 분단세력으로 꾸려진 1948년 초대 국회와 정부의 민낯이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서고 북한도 이를 빌미로 9월 9일 정부를 세운다. 그렇게 분단된 조국에서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대한민국 육군 소위이자 미군 정보부대 소속이던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진다. 1년 뒤 김규식이 경고했던 동족의 상잔상학(相殘相虐) 6·25가 터지고, 김규식은 삼청장에서 북으로 끌려간다. 따뜻한 부산에서 태어난 김규식은 1950년 12월 고희를 맞은 나이에 차디찬 압록강변에서 삶을 마친다.

친일파 민영휘 후손의 삼청장, 중앙일보 홍석현 인수

삼청장의 원 소유주는 친일파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이다. 그는 1925년 6월 이 집을 매입했는데 해방을 맞아 정국이 변하자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에게 내준다. 친일 광산업자 최창학이 경교장을 김구에게 내준 것과 같다. 수십 년 국외로 떠돌며 독립운동을 펼치던 민족지사들이 국내에 거처를 갖고 있을 리 없었다.

▲ 서울 종로구 삼청동 삼청장. 백범 김구가 머물렀던 종로구 경교장과 서대문형무소. ⓒ 구글

6·25 때 김규식이 납북된 뒤 민규식 소유 삼청장은 건물이 헐린 채 터만 남는다. 민규식 후손들이 세금을 안 내 삼청장은 2007년 국고로 귀속된다. 2008년 12월 감정가 78억6천만 원으로 경매에 나왔고, 2009년 <중앙일보>를 소유한 중앙홀딩스 홍석현 회장이 40억 원에 낙찰받는다.

홍석현 회장이 국유지와 교환한 삼청장, 청와대 관리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이때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홍석현 회장이 경매로 사들인 삼청장 터를 다른 국유지와 교환한 것이다. 왜, 어떻게 이런 교환이 이뤄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경교장을 구입한 삼성병원측이 경교장을 복원해 관리하는 것과 대조된다. 청와대 관리 아래 일반출입이 통제되는 삼청장은 하루하루 역사적 의미를 잃어간다.

▲ 청와대 경호원들이 출입을 막는 노란 원 부분이 삼청장 터다. 그 앞은 일반 건물로 가득해 청와대 경호에 삼청장 터가 왜 필요한지 의문이 생긴다. ⓒ 윤종훈

삼청장 터에서 100m 떨어진 삼청동주민센터를 찾아 삼청장에 관해 물었더니 “삼청장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 본다”는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상급기관인 종로구청 문화과 문화재관리팀을 찾아봤다. 강영식 주무관은 “삼청장은 아직 문화재 목록에 있지 않고 문화재 지정 또한 논의된 바 없다”고 밝혔다. 서울시청 문화본부 역사문화재과도 찾아가 봤지만, 역시 돌아오는 답은 “삼청장은 서울시 지정문화재 목록에 없다”는 말뿐이었다.

전문가들 “남북협상·좌우합작 기념관으로 복원”

출입을 통제할 뿐인 청와대, 그리고 삼청장의 사적지 가치에 관해 논의조차 못 하고 있는 서울시와 달리, 학계와 독립운동 단체 관련자들은 한목소리로 사적지로서 보존과 복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장원석 학예사는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해방 이후 3대 민족지사(김구, 김규식, 이승만)가 국내에 머물던 곳 중 하나인 삼청장이 문화재 가치가 있는데도 청와대 소유로 돼 있어 보존·복원사업을 진행하는 데 어려운 점이 있다”며 다음과 같은 활용방안을 내놓았다.

“최근 문재인 정부나 서울시에서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문화재 복원 얘기가 나오잖아요. 이승만의 이화장, 김구의 경교장처럼 독립운동가가 머물던 삼청장도 김규식 선생의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의 뜻을 기리는 용도로 활용할 수 있게 기념관으로 복원해야 합니다.”

심지연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도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역사 인물의 단순한 주거공간의 의미를 벗어나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시설로 재탄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방 이후 우사 김규식 박사가 귀국해서 김구 선생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며 좌우합작, 남북협상 등 활동을 펼쳤던 장소인데 우사의 독립 정신이나 남북통일을 향한 염원을 실현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했으면 좋겠습니다.”

경교장과 이화장은 문화재 지정, 이젠 삼청장

이승만이 귀국해 살던 대학로 한국방송통신대학 뒤편 낙산 자락의 이화장은 조선중기 문신 신광한의 집터였다. 1982년 12월 28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뒤, 1988년 큼직한 동상도 들어섰다. 2009년 4월 28일에는 국가지정 사적 제497호로 승격됐다.

이승만의 단정과 분단정책에 반대한 김구의 경교장은 현재 강북 삼성병원 소유로 병원 더 안에 있다. 이화장보다 늦은 2001년 4월 6일 서울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됐지만, 국가사적 지정은 더 빨라 2005년 6월 13일 이뤄졌다. 사적 제465호다. 복원작업을 거쳐 2013년부터 일반에 공개돼 김구의 애국사상과 민족정신을 시민들에게 들려준다. 이제 김규식의 삼청장 차례다.

▲ 해방정국 세 지도자. 왼쪽부터 김규식, 이승만, 김구. ⓒ 위키피디아

청와대 경호시설 설득력 낮아, 청와대가 나서야

삼청장 터가 청와대 경호에 꼭 필요했다면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이미 경무대∙청와대 경호부지로 포함했을 터이다. 권력자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게 가능한 시절 1968년 김신조 무장간첩침투 사건 뒤에도 청와대 시설로 포함하지 않은 것은 경호시설로 꼭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 이후라도 필요했다면 2008년 친일파 민영휘 후손들로부터 국가가 환수했을 때 일반 경매로 홍석현 회장에 넘길 게 아니라 청와대 소유로 바꿨어야 옳다.

일제에 쫓기며 목숨 걸고 수십 년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을 막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추진한 민족지사 김규식의 삼청장을 사적지로 복원하는 문제는 27일 열리는 2차 북미정상회담과 닮았다. 톱다운 방식으로 김정은과 트럼프가 통 큰 합의와 해결책을 모색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민족교육’과 ‘통일교육’의 장으로 삼청장 복원 문제는 서울시가 아닌 최고권력 청와대가 풀 문제다.

▲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에서 본 청와대. 많은 중국 관광객이 청와대를 촬영하는 포토존이다. ⓒ 윤종훈

북한에서도 김규식을 ‘애국열사릉’에 안장하고 민족지사로 인정한다. 남북 모두에서 존경받는 김규식의 삼청장 복원을 청와대에 요구하는 이유는 그가 남긴 한마디에 잘 담겼다. 하버드 대학 출신의 약관 30살 대위로 미군정 최고책임자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 역할을 맡았던 레오나르드 버치에게 남북협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건넨 말이다. 비핵화와 민족 공동번영의 과제에 직면한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로도 천근처럼 묵직하다.

“나에게는 이것이(방북이) (분열을 막는)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첫 번째 기회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를 놓고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치고 수강생은 한 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취재와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인데 첨삭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월요일 오후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도 첨삭을 거쳐 실립니다.

편집 : 장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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