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이생망’

▲ 고하늘 PD

"우리는 네가 인생을 망치게 놔둘 수 없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닐 페리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말이다. 미국의 명문 웰튼 아카데미를 다니던 닐은 새로 부임한 존 키팅 선생을 만나 연극배우의 꿈을 갖게 된다. 그러나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원하던 아버지는 닐을 집으로 데려와 학교에서 자퇴시키겠다고 경고한다. 아버지 고집을 꺾지 못한 닐은 그날 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만다. 걱정하고 위한다는 말이 결국 자식의 인생을 끝내고 만 것이다.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한겨레21> 인터뷰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내가 너를 낳고 길렀으니 무언가를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식으로 구는 건 전형적인 채권자 태도"라고 말했다. 부모가 자녀를 독립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자녀를 소유하거나 마음대로 하려 하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이길 것을 명령하고 지시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청소년은 부모에게 보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나는 왜 이것밖에 못 할까라는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해나 자살을 하게 된다.

교육부가 2018년 전국 중·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학생정서·행동특성검사' 설문조사를 한 결과 중·고등학생 7만여명이 자해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자해를 한 적이 있나'라는 질문에 중학생 51만4710명 중 4만505명인 7.9%, 고등학생은 45만2107명 중 2만9026명인 6.4%가 ‘자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중학생은 100명 중 8명, 고등학생은 100명 중 6명꼴로 자해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가운데 청소년 자살률 1위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청소년은 부모에게 보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나는 왜 이것밖에 못 할까라는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해나 자살을 하게 된다. ⓒ pixabay

10대의 자살이나 자해를 단순히 관심을 받기 위한 행동으로 치부하는 어른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마이클 홀랜더는 저서 <자해 청소년을 돕는 방법>에서 “일부 전문가에 의하면 4% 미만 청소년이 관심을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해를 한다”고 했다. ‘이번 생은 망했어’를 줄인 '이생망', 울고 싶은데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감정을 숨긴다는 뜻을 가진 '민모션'과 같은 신조어의 등장과 SNS에 자해하는 모습을 공유하는 자해계정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며 청소년의 자살과 자해는 하나의 사회현상이자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 문제를 해결한다며 청소년을 위한 예산과 상담 인력을 늘리고 정책을 만들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중요한 해결책을 놓치고 있다. 당사자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바로 해결책이다. 왜 청소년이 자해하고 자살을 선택하는지, 지금 청소년은 무슨 고민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직접 묻고 듣지 않는다면 문제는 반복될 뿐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이 학생들에게 한 말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닐까?

* 글쓴이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10기이며, 지난해 말 KBS PD로 입사하기 전에 이 글을 제출했습니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박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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