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㉜ 동·서양 역사 속 평화협정

전주시 한옥마을로 가보자. 유려한 외관의 풍남문을 돌면 왼쪽으로 경기전(慶基殿)이 나온다. 태종은 1410년 부왕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건물을 전주에 짓고, 경기전이라 부른다. 세종은 1445년 경기전에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설치하고 실록을 봉안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오직 전주사고 실록만 관민의 헌신적 노력으로 살아남는다. 그 덕에 우리는 온전히 조선 역사를 읽고 TV 사극을 본다. 우리 역사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왜군의 만행 흔적을 찾아 일본 교토(京都)로 가보자. 전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기리는 풍국신사(豊國神社) 앞에 귀무덤(혹은 코무덤)은 임진왜란의 비극을 상징한다. 왜군이 조선사람 귀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가져다 무덤을 만들었으니 한민족 수난이 배어난다. 7년을 끌며 강토와 문화를 초토화시킨 임진왜란을 조선은 어떻게 갈무리했을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평화와 고요’라는 뜻의 센토사(싱가포르)에 이어 베트남에서 27, 28일 2차 정상회담을 한다.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평화와 고요’를 되찾을 수 있을지, 인류사 평화협정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조선통신사, 임진왜란 뒤 평화와 국교 회복

▲ 대마도 이즈하라 조선통신사 기념비. 임진왜란 뒤 조선통신사 외교로 평화를 되찾고 국교를 회복했다. ⓒ 김문환

부산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1시간 10분이면 대마도 북단 히타카쓰(比田勝)항, 1시간 50분이면 대마도 남단 이즈하라(嚴原)항에 닻을 내린다. 이즈하라에 대마도주 소(宗)씨 가문이 살던 성이 자리한다.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결혼한 집안이다. 성 근처 박물관 입구에는 조선통신사를 기리는 기념비, 박물관에는 조선통신사 일행을 그린 화첩이 조선-일본 외교의 전설을 들려준다. 조선통신사는 1413년 태종 13년 첫발을 떼 임진왜란으로 중단될 때까지 8차례 파견됐다.

임진왜란 뒤 일본의 요구로 조선통신사가 부활의 날개를 편다. 1607년 선조 40년 정사 여우길을 포함해 504명의 조선통신사가 대마도와 본섬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도쿄(東京)의 도쿠가와(德川)막부 쇼군을 만나 국교 정상화의 물꼬를 튼다. 1609년 광해군 1년 일본과 13개 조의 기유약조(己酉約條), 일종의 평화조약을 맺는다. 1636년 인조 14년 파견한 조선통신사는 여진족 청나라 견제를 모색했으니 적이 우방이 되는 냉엄한 국제관계 현실을 보여준다. 1811년 조선통신사가 대마도에서 멈춘 것을 끝으로 총 20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중단되고, 이후 흥선대원군 때 단절된 국교는 결국 일제의 조선 침략으로 이어진다. 교류와 외교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

베르사유, 세계대전 종전과 프랑스-독일 협력

▲ 콩피에뉴 숲 기차 기념관. 이곳에서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1차세계대전 종전 협정이 맺어졌다. ⓒ 김문환

프랑스 파리에서 북동쪽 60여㎞ 거리 우아즈(Oise)강가에 콩피에뉴(Compiegne)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울창한 ‘콩피에뉴 숲(Foret de Compiegne)’ 속 기차 기념관이 100년 세월을 넘어 탐방객을 맞는다. 철로 끝에 초라한 건물처럼 보이는 이 기차에서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1차 세계대전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1914년 9월 1일 시작된 전쟁은 12월 크리스마스 전에 끝날 것이란 예상과 달리 4년 넘게 끌며 무려 1000만 명이 숨지거나 다친 미증유의 대참사였다. 작은 기차에서 마무리 지을 전쟁이었건만…

▲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1919년 6월 28일 1차 세계대전 강화조약이 맺어진 장소다. ⓒ 김문환

이번에는 무대를 파리 남서쪽 20㎞ 지점의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겨 보자. 한국 관광객도 많이 찾는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은 콩피에뉴 숲 기차에서 조인된 정전협정에 따라 이듬해 1919년 6월 28일 전후처리 강화조약을 맺은 장소다. 비록 과도한 부담에 짓눌린 독일의 반발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또 한 번의 비극을 거치지만 결국 프랑스와 독일은 유럽 평화와 번영을 위해 적에서 친구로 손잡으며 오늘에 이른다. 참고로 베르사유 조약은 우리 민족에게는 쓰라린 경험이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1918년 1월 제시한 ‘평화원칙 14개 조’, 그중에서도 5조 ‘주권평등과 민족자결주의’는 대한의 우국지사들을 열광시켰다. “모든 민족과 국가가 자유와 안전을 보장받고, 더불어 살 권리를 갖는다”며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한 윌슨은 ‘영구평화론’을 주창한 이마누엘 칸트의 재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구두선(口頭禪), ‘빛 좋은 개살구’로 끝난다. 8개 국어를 구사했다는 진보적 민족주의자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를 찾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절단은 승전국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의 잔치장인 ‘거울의 방’에는 입장도 못 했으니 말이다.

파르테논 신전, 평화협정 산물에서 관광대국 상징으로

▲ 파르테논 신전. BC448년 페르시아와 칼리아스 화약을 맺은 아테네가 평화를 찾은 기념으로 BC447년 재건공사에 들어가 BC438년 완공시켰다. ⓒ 김문환

그리스 아테네를 찾는 탐방객들이 맨 먼저 보고 싶어 하는 유적은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다. 소크라테스가 거닐던 고대 아고라의 판아테나이카 도로를 가로질러 귀족회의가 열리던 아레오파고스 바위를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 돌계단 위로 ‘숫처녀 신전’이라는 뜻의 파르테논 신전이 위용을 뽐낸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 시민들이 수호여신 아테나를 기려 도시 맨 꼭대기 아크로폴리스에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지구촌 최대제국 페르시아가 눈엣가시 아테네를 굴복시키기 위해 BC480년 쳐들어온다. 스파르타 300결사대가 아테네 북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원 숨지며 페르시아의 진격을 늦춘 틈을 타 아테네인들은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한다. 이때 아테네를 점령한 페르시아가 신전에 불을 지른다.

아테네는 해군을 활용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를 격파한다. 물러난 페르시아와 아테네는 이후 30년 넘게 으르렁거리며 지중해 각지에서 부딪친다. 그러다 BC448년 아테네의 칼리아스가 이끄는 사절단이 페르시아와 평화조약을 맺는다. BC1세기 시칠리아에 살던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로스는 당시 칼리아스의 이름을 따서 ‘칼리아스 협약’으로 불렀다고 적는다. 40년 넘게 지속된 전쟁을 종식시킨 이 협약으로 평화를 되찾은 아테네는 이듬해 BC447년 불에 탄 파르테논 신전 재건에 들어간다. 9년 만인 BC438년 완공된 건물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평화를 원했던 아테네인들이 2500여 년 뒤 후손들에게 관광대국의 밑천을 물려준 셈이다.

이집트 람세스 2세, 히타이트와 80년 전쟁을 평화로

터키는 1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유럽과 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잃는다. 에게해, 지중해의 모든 섬도 마찬가지다. 제정이 붕괴되고 공화정을 이끈 케말 파샤는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아나톨리아의 중심 앙카라로 옮긴다.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200여 ㎞ 가면 보아즈칼레(Bogazkale·일명 ‘보가즈쾨이’)라는 마을 뒤편에 유적지 하투샤가 나온다. 3500년 전 지구상 최초로 철기문화를 꽃피운 히타이트의 수도였다.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투샤는 거대한 성벽과 다양한 건물 유적이 남아 강력한 기마전차군단의 위용을 뽐내던 히타이트의 전설을 피워낸다. 이곳에서 1906년 발굴된 작은 점토판이 고대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역사는 물론 전쟁 뒤에 평화를 더 갈망했던 인류의 염원을 오롯이 전해준다.

▲ 이집트-히타이트 평화협정 점토판. 두 나라는 80년 갈등과 전쟁을 접고 결혼동맹, 상호원조동맹을 맺는다. BC1259년. 터키 보아즈칼레 하투샤 출토.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 김문환

점토판을 보러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제국의 문을 지나 왼쪽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으로 가보자. 한국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트로이와 그리스로마의 주옥같은 유물을 지나 히타이트 전시실의 ‘이집트-히타이트 평화협정 점토판’이 주인공이다.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중간지대인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 일대 페니키아 도시 관할권을 놓고 카데시 전투(BC1275년·브리태니커 사전 연대)를 벌인다. 이집트 왕은 즉위 5년째를 맞은 29세의 혈기방장한 람세스 2세였다. 그는 2만 명의 군대와 2000대 전차를 4개 군단으로 나눠 오늘날 시리아 땅 오론테스 강변의 운하도시 카데시로 간다.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 2세는 4만 명 병력에 3000대의 전차군단을 이끌고 왔다. 초기에는 히타이트가 기습작전으로 우세했지만 곧 팽팽한 백중세, 지루한 공방전 끝에 휴전을 맺는다. 이후 간헐적 충돌을 계속하지만 어느 쪽도 상대를 제압하지 못한다. 무와탈리스 2세의 아들, 즉 조카를 내쫓고 왕이 된 하투실리스 3세는 람세스 2세에게 평화를 제안하고, 마침내 16년 만인 BC1259년 평화조약을 맺는다. 람세스 2세의 부친 세티 1세는 물론 그전 18왕조부터 따지면 80년 가까이 이어지던 양국 갈등과 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이집트-히타이트 평화협정은 결혼과 상호원조동맹

평화조약은 쐐기문자로 점토판에 기록됐고, 히타이트 수도 하투샤 문서고에서 발굴됐다. 람세스 2세는 조약을 이집트 수도 룩소르의 카르나크 아몬신전, 람세스 2세 장례전인 라메세움, 람세스 2세 신전인 아부심벨 벽면에 새겼다. 물론 자신에게 유리하게 각색해서다. 전쟁을 평화로 바꾼 양측은 실질적 평화를 담보할 조치를 취한다. 히타이트 공주가 람세스 2세 왕비로 갔으니 결혼동맹이다. 훗날 알렉산더도 페르시아 추종세력을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에서 굴복시킬 때 적장 옥시아르테스의 딸 록사나와 결혼하며 BC327년 전쟁을 마무리 짓는다. 백제 동성왕도 493년 신라 왕족 여성과 혼인하며 결혼동맹으로 고구려 위협에 맞서지 않았던가.

BC1246년 이집트로 시집온 히타이트 공주는 이집트식 이름으로 마트호르네페루레. 하투실리스 3세는 BC1239년경 또 다른 딸을 람세스 2세에게 보낸다. 먼저 결혼한 딸이 숨지자 취한 조치로 보인다. 람세스 2세가 죽고 아버지를 이어 파라오가 된 13번째 아들 메르네프타(재위 BC1212년~BC1202년)는 동맹을 이어간다. 히타이트가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난에 시달리자 상호원조 조항에 따라 곡물을 보내준다. 이집트의 비옥한 나일강 하구는 밀의 주생산지로 오리엔트의 곡창 구실을 했다. 적에서 결혼동맹, 원조동맹으로 하나 된 모습은 고대의 훈훈한 미담에 그치지 않는다. 1970년 터키가 조약 점토판 복제품을 만들어 유엔에 기증했고, 유엔은 세계평화와 협상을 상징해 뉴욕 본부건물에 이를 내걸었으니 말이다.

지구상 가장 오래된 평화협정, BC2250년 메소포타미아

▲ 메소포타미아 아카드왕국 나람신왕과 페르시아 고원 엘람왕국 아난왕 평화협정 점토판. BC2250년. 이란 수사 출토. 루브르박물관. ⓒ 김문환

파리 루브르로 가보자. 흔히 ‘이집트-히타이트 평화협정’을 지구상 최초의 평화협정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수메르를 물리치고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아카드왕국의 나람신왕과 메소포타미아 동쪽 이란 고원지대 엘람왕국 아난왕이 BC2250년 맺은 조약 점토판이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다. 프랑스 고고학팀이 엘람왕국의 수도이던 이란 수사에서 출토한 유물이다. 인류는 전쟁이라는 갈등도 있지만, 곧 평화로 번영을 되찾는 역사를 이어왔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66년이 지나도록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대결 상태인 북한과 미국이 27, 28일 온고지신의 평화정신을 발휘해 친구가 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미국과 무려 11년 동안 잔혹한 전쟁을 치렀지만, 적에서 친구가 된 베트남 회담이어서 더욱 그렇다.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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