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세대간 소통'

▲ 양영전 기자

올해는 내가 설 차례를 지내야 한다. 지난해 말 아흔 살이던 아버지가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제 때 제주에서 태어나 성인이 될 무렵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4.3항쟁을 몸소 겪었다. 토벌대를 피해 달아나다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불편한 한쪽 다리로 평생을 살았다. 그는 내가 학교에서 배운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현장에서 체험했다.

아버지 얘기를 하면 대개 크게 놀란다. 아버지와 나의 나이 차이에 놀라고, 아버지가 고향인 제주시 화북동에서 훈장(訓長)을 했다는 사실에 신기해한다. 아버지 얘기를 하다 보면 자연히 어머니에 관한 질문이 이어진다. 어머니 얘기를 듣고 난 이들은 인체의 신비에 감탄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위로 딸 여섯을 둔 뒤 쉰이 넘은 나이에 아들인 나를 낳았기 때문이다. 누구 할 것 없이 대화 마지막에 가서는 대개 "부모님과 말이 통하느냐"고 묻는다.

‘틀딱충(틀니를 딱딱거리는 노인)’ ‘노인충(노인+벌레)’ ‘할매미(시끄럽게 떠드는 할머니)’ ‘연금충(노령연금으로 생활하는 노인)’… 최근 우리 사회에 등장한 노인을 비하하고 혐오하는 표현들이다. 청년세대가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처럼 싸늘하다. 유엔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4% 이상이면 고령사회로 분류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처음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혐로’(嫌老)라는 단어는 ‘경로’(敬老)를 비꼰 말인데 고령사회에서 노인들이 어떤 존재인지 보여준다.

노인 혐오는 세대 간 불통과 대화 단절에서 온다. 나만 하더라도 부모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아득하다. ‘2017년 노인인권실태조사’에서 노인 중 51.5%는 ‘청장년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청년과 노인 사이에는 높은 장벽이 존재한다. 세대간 불통은 우리 사회에 혐오를 불러왔다. 대화와 만남이 없어지면서 서로를 배척한다.

▲ 주름이 깊게 패일수록 세대간 불통도 깊어진다. ⓒ pixabay

예전에는 ‘늙음’이 ‘지혜’와 동의어로 여겨져 노인이 존중받았다. 지혜는 경험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인식이 세대 간 불통을 야기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인세대가 한국사회의 근대화를 겪으면서 경험에 의존하는 소통 양식을 갖게 됐고, 합리적, 논리적 사고를 지향하는 젊은 세대와 쌍방향 소통이 힘들게 됐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 때는~”으로 시작되는 대화 방식에 젊은 세대가 ‘꼰대’라고 비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어머니는 매주 수요일 마을회관에 간다. 유일한 사회활동이라 할 수 있다. 마을회관에는 노인밖에 없다. 노인은 노인끼리 청년은 청년끼리만 어울린다. 우리 사회에는 노인과 젊은 세대가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場)이 없다. 오는 2026년 한국은 노인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전망이다. 고령화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데 청년과 노인이 세대간 갈등을 풀어나갈 사회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일본 순사 이야기나 4.3 때 옆 마을이 통째로 불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내게 대단한 이야기꾼이자 역사가였다. 4.3에 관한 나의 역사의식은 그가 심어준 것이다. 거의 대부분 아버지 같은 농어민들이 총을 맞고 죽어간 4.3은 긴 세월 ‘좌익의 준동’으로만 역사책에 기록됐다. 이제 역사적 신원은 일부 이뤄졌지만 어렵게 한 시대를 살아남은 노인들은 대접을 받기는커녕 혐오에 시달린다. 아버지 눈에 오늘날 혐로사회는 어떻게 비쳤을까?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더욱 그리워지는 설날이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홍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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