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너라 벗고놀자] 우세린 부부 여행기 ①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는 활성화한 마그마 작용 덕분에 온천이 발달해 있다. 온천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신성시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온천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인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의 온천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 주변에 온천 리조트를 지었다. 전현직 기자 부부가 이 지역 무료 자연 온천을 다니며 썼다.

“머럴 스탑! 머럴 스탑!”

아따, 뭐를 멈추라는 거야! 미국 서남부 샌버나디노 국유림이 숨겨 놓은 딥크릭 온천(Deep Creek Hot Springs)으로 가기 위해 사유지인 보웬 랜치(Bowen Ranch)에 차를 세웠다. 안내소로 보이는 낡은 오두막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쓴 백인 아저씨가 소리 치며 고개를 내밀었다. ‘아하…. 모터 스탑! 차 시동을 끄라고….’ 나의 영어 뇌세포는 가끔 이렇게 버퍼링이 길다. 차량 시동을 끄고 10달러 주차요금(1인당 5달러)을 낸 뒤 손으로 그려진 지도를 받았다. 까칠한 문지기는 <엘에이 매거진>(LA Magazine)이 혹평했던 총을 가진 그 불친절한 사내인 것 같았다.

▲ 차를 세워두고 약 4km쯤 사막 산을 걸어야 온천에 도착할 수 있다. 길에는 사막 꽃들이 지천에 피어 있다. 붉은 꽃이 그대로 말라 초콜릿 빛깔을 띤다. ⓒ 유순상

인생 최초로 자연 노천 온천으로 향하는 길. 개발이 안 된 100% 자연 모습 그대로라고 하니 ‘야생 온천’이라 함이 옳겠다. 캘리포니아는 환태평양 지진대인 ‘불의 고리’에 위에 있어 마그마를 찍고 올라온 마구 끓는 온천과 마그마 수증기에 데워진 사막 온천 등이 발달해 있다. 캘리포니아 중부와 남부만 해도 일반에 무료 공개된 노천 온천이 40곳이 넘는다. 물론 돈을 내고 들어가는 온천 리조트는 셀 수 없이 많다.

사막 야생화, 여름잠 자는 두꺼비, 두 얼굴의 생태

딥크릭 온천은 샌버나디노 국유림 모하비 사막 북쪽에서 솟는다. 행정구역은 샌버나디노 카운티 애플밸리로 LA에서 남쪽으로 145㎞. 차로 두 시간 거리다. LA와 샌디에이고에서 접근하기 좋은 온천 중 하나다. 크릭은 우리말로 개울, 냇가를 말한다. 이 일대는 건조한 사막 기후다. 샌버나디노 일대 산맥이 서쪽 태평양에서 몰려오는 비구름을 막아 일 년 내내 비그늘이 진다. 이 때문에 이 산을 기준으로 서쪽은 산림이 겹겹이 쌓여 깊고 울창하지만 동쪽은 키 작은 덤불로 구성된 사막 관목지대다. 캘리포니아 자연의 극적인 두 얼굴을 동시에 목격할 수 있다.

이곳의 다양한 생태 환경은 미 남서부에서는 만나기 힘들다. 특히 온천 근처에는 딥강이 흘러 강기슭에 버드나무류와 떡갈나무 계열의 활엽수가 자라고 동시에 침엽수인 피뇬(Pinyon) 등 여러 종류의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막 야생화도 지천으로 피어난다. 기름을 짜 쓰는 연 노란색 꽃 크레오소트(Creosote)와 긴 줄기에 하얀색 꽃이 종종종 달려 있는 장미과의 차미스(Chamise), 빨간 꽃대롱의 펜스테몬(Penstemon), 달빛 꽃밥을 안고 있는 연보랏빛 호아리 애스터(Hoary Aster) 등이 있다. 자세히 봐야 찾을 수 있다.

▲ 딥크릭 온천에 있는 탕이다. 아침 일찍 도착해 물이 더 깨끗하다. 탕을 휘젓고 다니면 돌에 붙은 이끼가 올라와 탕이 혼탁해질 수 있다. 아내가 참지 못하고 탕으로 뛰어들었다. ⓒ 황상호

푸른빛이 감도는 이름 모를 검은 새와 각종 도마뱀, 멸종 위기종인 소협곡 두꺼비 ‘애로요 토드(Arroyo Toad)’가 서식한다. 애로요 토드는 몸집이 7㎝로 작은데 날씨가 건조해지는 8월 잠이 들어 이듬해 1월 깬다. 겨울잠이 아니라 여름잠이다. 이곳은 또 대표적인 송어 서식지이다. 낚시꾼들은 루어로 크기 203㎜ 이상의 송어를 하루 2마리만 잡을 수 있다.

보웬 랜치 카우보이 오두막에서 차로 조금 더 들어가 트레킹으로 이어지는 막다른 공터에 주차를 했다. 온천까지는 약 4㎞, 걸어서 50분 정도 거리다. 조금 거친 산책 수준의 난도다. ‘까칠남’이 준 지도가 꽤 정확해 간단한 기호를 보고도 거뜬히 온천을 찾아갈 수 있다. 길은 경사길 모래 바닥이라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방울뱀도 주의해야 한다. 여름에는 낮 기온이 38도를 쉽게 웃돈다. 물을 충분히 챙기고 모자와 선글라스, 선크림도 준비해야 한다. 겨울철 눈만 피하면 일 년 내내 걷기 좋다.

세상의 엉덩이, 선글라스가 필수품인 이유

얼마나 걸었을까? 멀찍이 살집이 있는 노인의 뒤태가 보인다. 어라? 그, 런, 데! 아래가 휑하다. 노팬티! 영어로는 ‘버스데이 수트(Birthday Suit)’. 머리에서 범종이 두웅 친다. 노인은 태연히 “굿모닝” 인사를 건넨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번에는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하우아유” 인사를 한다. 아, 아랫도리에 벌건 것이 바짝 서있다. 말로만 듣던 나체족이다.

▲ 트레킹 가는 길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나체족이다. 캘리포니아 주법상 공공장소 음란 행위는 금지돼 있지만 산림당국은 일부 지역의 나체 행위는 허락한다. 나체는 음란하다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 황상호

이곳은 누구나 원하면 발가벗고 다닐 수 있는 이른바 선택적 나체 지역이다. 스타일도 다양하다. 아랫도리를 완전히 개방한 남자, 손수건으로 앞 주요 부위만 막은 남자, 일본 훈도시처럼 엉덩이는 노출하고 앞을 천으로 감싼 남자. 여성은 팬티만 입고 가슴만 노출하거나, 아래 위를 모두 벗었다. 그래도 여행자 절반 이상은 속옷을 입었다.

보편적인 것은 아니지만 미국 노천 온천에서는 나체족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만의 웹사이트를 만들어 나체에 관한 세계 뉴스를 모으기도 하고 6월 21일을 ‘국제누드하이킹의 날’(National Nude Hiking Day)로 정해 해시태그 ‘#HikeNakedDay’로 서로 나체 행각을 공유하기도 한다. 비영리조직인 자연주의행동위원회(naturist action committee)와 신체자유조합(body freedom collaborative) 등이 활동하고 있다. 나체 관련 영화제와 ‘세계나체조경의 날’(World Naked Gardening Day), ‘세계나체자전거타기’(World Naked Bike Ride) 등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아무튼 온천에서는 운이 좋다(?)면 남자의 성기에 금속 액세서리로 피어싱을 한 ‘프린스 앨버트(Prince Albert)’도 목격할 수 있다. 선글라스가 필수품인 또 다른 이유다.

탕에 누워 오그르르 풀리는 몸에 맥주 한 잔

온천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나무에 해먹을 걸어 낮잠을 자거나 술을 마시고 기타를 치고 있었다. 온천탕에는 예닐곱 명이 복닥복닥 모여 목욕을 즐기고 있다. 적당한 웃음과 수다스런 대화가 커피숍 작은 음악처럼 정겹다. 나도 옷을 벗고 물에 반쯤 몸을 담갔다. “팔다리가 오그르르 풀리는 자릿함이 제법 즐겁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 주인공 명준이 중립국으로 가는 선상 침대에 누워한 한 말이 떠오른다. 나는 명준이 마신 일제 양주 대신 맥주 한 캔을 땄다. 향긋하고 콰하니 기분 좋다.

▲ 온천 옆을 흐르는 딥강이다. 뜨거운 온천수가 이곳으로 이어지지만 제법 물길이 커 물이 차갑다.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수영을 하다 뜨거운 온천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 황상호

딥크릭 온천에는 차갑고, 미지근하고, 뜨겁고, 열라 뜨거운 탕 5~6개 있다. 각 탕에는 별명이 있다. 수온이 약 39도로 다른 탕과 2~3m 떨어져 낮은 곳에 있는 ‘게솥’(Crab Cooker)과 큰 암석 가까이 함께 모여 있는 ‘기념일 탕’(Anniversary Pool), 수온이 26도로 미지근한 편인 ‘자궁’(Womb) 등이 있다. 온천에 16번째 왔다는 샌디에이고 출신 흑인 친구 저니는 “내가 알기로는 지금 네가 있는 곳이 ‘기념일 탕’이야. 내 생각에는 그렇다는 말이지. 사실 정확히 어디가 어딘지는 여기 자주 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늘 논쟁거리야”라고 눙치며 웃었다.

▲ 딥크릭 온천에는 게솥, 기념일, 자궁 등의 별명이 붙은 탕 대여섯개가 있다. 여행자들이 돌로 물길을 막아 탕의 개수가 때로는 늘어난다. ⓒ 유순상

다양한 피부색의 남녀노소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벗고 다니고 주위 사람들도 전혀 낯설어 하지 않는다. 어떤 여성은 옆에 ‘남자 친구’와 ‘남자 사람 친구’가 같이 있는데도 속옷을 갈아입거나 나체로 다닌다. 내가 아내에게 “미국 여자 찌찌 별로 안 크네”라고 말하자 아내도 “미국 남자 꼬추도 별 볼 일 없네”라고 응수했다.

다양한 그림도 감상할 수 있다. 팔뚝에 문신한 독개구리와 뱀대가리. 종아리에 그려진 용과 일본 무사, 팔목에 대충 새긴 낙서 등등. 왼쪽 팔뚝에 ‘배울 학(学)’ 자를 새긴 백인 친구 밴은 “여자 친구가 문양이 예쁘다고 골라줬어”라고 말했다. 대학과 관련된 일을 하냐고 물었더니 “경영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땄고 아직 학교에 있으니 그런 셈이지”라고 겸연쩍어 했다. 이 녀석도 알몸이다.

피시티, 미 서부 종단 트레일을 걷다

이곳은 세계적인 장거리 도보여행길인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이 통과하는 곳이기도 하다. 피시티는 미서부 최남단 캘리포니아 국경도시 캠포에서 북단 캐나다 국경지역인 매닝파크까지 4270㎞를 종단하는 도보여행길이다. 여행자들은 보통 4월 중순 남쪽에서 출발해 3주째쯤 이 온천을 돌파한다. 한인 참가자들 말을 종합하면 한인 도전자도 매년 늘어 2018년 기준 약 40~50명 정도가 피시티 길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해 한인 중년 남성 한 명이 도보여행 중 심장마비로 숨졌다.

두 번째로 온천을 찾아갔을 때 우리 부부는 피시티를 느끼기 위해 보웬 랜치 반대 방향인 ‘딥크릭 하이킹 에어리어’(Deep Creek Hiking Area) 갓길에 차를 세우고 ‘브래드포드 릿지 길’(Bradford Ridge Path)을 걸었다. 온천까지 4㎞로 1시간쯤 걷다 보면 길 끝에서 피시티 구간을 만난다. 그곳에서 다시 온천까지는 320m로 피시티 전체 구간의 0.00007%다. 피시티 여행기 ‘와일드’로 피시티를 전 세계에 알린 작가 셰릴 스트레이드도 전체 구간을 완주한 것은 아니었으니 나도 어쩌면 피시티 여행자라 하겠다. 다만 이 구간에는 제대로 된 이정표가 없어 길을 잃을 수 있다.

11월 중순, 미 서북부 워싱턴 주에서 4개월 전 남쪽으로 출발한 여성 피시티 여행자 헬레인을 온천에서 만났다. 쉰내가 3m 앞에서도 팍 났다. 그날 헬레인 곁에는 LA에서 온 남자 사람 친구 둘이 10㎞를 동행하고 있었다. 남녀 셋은 팬티만 입고 같이 온천에 들어왔다. 헬레인은 “대학 졸업하고 이제 뭘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피시티 여행을 결심했다”며 “이 땅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몰라 매일 감탄하고 있다”고 했다. 청년과 고민, 길은 세계의 주제어인가 보다.

잘 보면 온천 어딘가에 ‘하이커 박스’라 불리는 아이스박스가 있다. 피시티 엔젤이라 불리는 민간 봉사자들이 도보 여행자들을 위해 먹을 것을 넣어 두거나 여행자들끼리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공유하는 상자다. 온천 여행길, 하이커 박스를 만난다면 배낭 속 먹을 만한 물건이나 유용한 물건을 두고 가보자.

떠날 채비를 하는데 수다스러운 친구 저니가 하루 밤 자고 가라고 권했다. 공식적으로 캠핑이 금지된 지역이지만 산림당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 여기는 누가 관리하냐고 물었다. 저니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했다.

“나도 관리하고 너도 관리하는 거지. 여기 모두가 주인이야. 쓰레기도 가져가고 지저분한 것이 있으면 보이는 대로 치워야지.”

몸을 충분히 식히고 걷는 것이 좋다. 사막을 되돌아가야 하는데 목욕으로 흐늘흐늘해진 몸 때문에 걷기가 더 힘들 수 있다. 특히 보웬 렌치 반대 방향은 급경사를 치고 올라가니 각오를 더 단단히 해야 한다. 얼음장 같은 가장 큰 탕에 들어가 체온을 낮추고 출발하는 것도 추천한다. 산속이라 해가 빨리 진다는 것도 명심하자. 아내와 나는 노을을 조명 삼아 어둑해진 출발지로 돌아왔다.


** 황상호는 <청주방송>(CJB)과 <미주중앙일보> 기자로 일한 뒤 LA 민족학교에서 한인 이민자를 돕는 업무를 하고 있고, 우세린은 <경기방송> 기자로 일한 뒤 LA 한인가정상담소에서 가정폭력 생존자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편집 : 오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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