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어느 텔레마케터의 연민

▲ 황진우 기자

오늘도 힘든 일과를 마감했다. 저기 진열된 상품은 이른바 ‘대박’을 터트렸다. 하루에도 몇 천 건 전화벨 소리가 나를 괴롭힌다. 아침 8시 출근해 저녁 6시 퇴근할 때까지 나는 전화받는 기계일 뿐이다. 인간인 나보다 잘 나가는 상품 덕분에 점심도 삼각김밥으로 때운다.

나는 대학에 다니며 영어 점수와 봉사활동 점수 등에 청춘을 바쳤다. 친구들보다 어쩌면 운이 좋아 졸업 후 바로 첫 직장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꿈꾸던 회사생활과는 달랐지만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하루하루 보냈다. 하지만 회사에서 구조조정이 있었다. 해고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봤을 때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1년 만에 청년 백수가 된 것이다. 당시 부장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미안해 황 사원, 어쩔 수가 없었어. 정부에서 소득주도성장 정책 발표한 거 봤지? 덕분에 우리 임금이 올랐지만 회사 자체에선 부담인가 봐. 나도 그렇고 다른 사원도 자네보다 오래 일했는데 우리를 구조조정하기 그랬나 봐. 일단 밖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있어. 자리 생기면 바로 연락할 게. 정말 미안해.”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지만 연락은 없었다. 아르바이트라도 구하기 위해 핸드폰을 종일 들여다봤다. ‘텔레마케터’. 전 직장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일을 하던 내 장점을 잘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일을 해야 했기에 이력서를 썼다.

구직했다는 행복감에 잠길 겨를이 없었다. 이곳이야말로 전쟁터다. 평소에도 바쁘지만 이곳도 전 회사처럼 직원 수를 감축하려 했기 때문이다. 감축 대상은 분기 안에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정해졌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억지웃음을 짓고 수많은 폭언에도 견딜 수밖에 없었다. 한 명이라도 더 내 고객으로 만들기 위해 1년 동안 맛있는 점심은 생각지도 못했다. 처음 정부 정책을 들었을 때는 시급이 올라 소득이 오른다는 생각에 행복했지만 이 정책의 끝이 구조조정이 될 것이란 생각은 못 했다. 다행히 구조조정 명단에는 빠졌다.

▲ '텔레마케터'는 20년 이내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업으로 꼽혔다. ⓒ google

얼마전 탕비실에서 팀장과 커피를 마셨다. 그는 부동산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부모 덕분에 강남 아파트 한 채를 얻었는데 그게 며칠 사이 2억이 올랐다나! 가진 자들은 가만히 있어도 통장 잔고가 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욱 서울에서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소득이 오르면 뭐하나, 집값도 더 올라가는데… 그렇다고 서울 생활을 포기하고 지방으로 내려 갈 수도 없는 처지다. 서울에서 버티고 버티면 언젠가 행복할 날이 올 거란 믿음은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아직 전세도 아닌 월세를 살고 있는 텔레마케터일 뿐이다.

나라는 아직도 소득주도성장론을 둘러싸고 시끄럽다. 정부와 야당은 소득주도성장과 국민성장으로 으르렁댄다. 차이는 성장동력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있다. 정부는 ‘저임금노동자와 가계의 소득을 올려 총수요가 증가해야 경제가 성장한다’고 한다. 대기업 성장에 따른 ‘낙수효과’와 반대된다. 정부는 소득주도성장론에서 일자리 창출의 주체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에 확실한 부동산대책부터 세워야 한다. ‘부동산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집값을 잡지 못한다면 어느 것도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다시 헤드폰을 쓰고 고객들을 맞이한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김양은 성과 달성 실패로 구조조정이 되었다.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김양의 월급을 우리 모두 조금씩 나눠 가지는 꼴이 되었다. 아르바이트 최저시급 인상으로 경력만 뽑는 세상에서 김양은 일을 구했을까? 퇴근 후 같이 소주나 한잔 하자고 문자를 보내본다.


한국이 극심한 갈등사회가 된 것은 자기만 이롭게 하려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발상에 너무 빠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좌우, 여야, 노사, 세대, 계층, 지역, 환경 등 서로 간 갈등 국면에는 대개 인간, 특히 강자나 기득권층의 자기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간이 넓어져야 할 때입니다. 그런 생각과 풍자가 떠오르는 이는 누구나 글을 보내주세요. 첨삭하고 때로는 내 생각을 보태서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봉수 교수)

편집 : 윤종훈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