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미학적 거리’

▲ 조승진 기자

몸에 잘 어울리는 옷차림을 한 채 육감적인 몸매를 보여주는 그녀를 본능적으로 눈알이 빠져라 다시 본다. 물론 취업준비생 신분이던 내게 그녀는 핸드폰 화면 속에서만 존재했다. 당장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자괴심과 가벼운 주머니가 발목을 잡았다. 예쁜 그녀 곁에는 괜찮은 남자들도 많을 것이다. 만나봐야 주눅만 들겠지.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신의 직장에 ‘입성’한 뒤에는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게 됐다. 직장 등급에 따라 배우자 격도 달라진다고 아버지가 누누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에게 꾸준히 연락해 접근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모델 같은 그녀와 함께라면 내 인생은 성공으로 기록될 게 뻔했다. 달아오른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려 왔다. 오늘은 첫 데이트 날이다. 

“야~ 축하해! 그렇게 고생하더니 성공했네!” 나갈 채비를 하던 와중에 친구 녀석이 전화를 걸어왔다. “응, 고마워. 너는 요새 어때?” 뻐기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점잖은 체했다. 잘 나갈수록 겸손해야 한다고 아버지는 누누이 말씀하셨다. “나는 뭐 똑같지, 맨날 연습하고.” 그래 뭐 똑같겠지, 넌. 친구는 꿈을 찾겠다며 잘 다니던 대학도 때려치우고 배고픈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전문직을 갖게 되는 건데, 천국을 버리고 지옥에 달려든 거다. 

▲ 주 52시간 업무 시간 제한 정책이 도입됐지만 일부 직장인들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 flickr

“그런데 너희 회사에서 사람 죽었다며?”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쓰러져 과로사한 김 씨 얘기를 하나 보다. “그 사람 세종시의 등대라는 별명도 있던데, 넌 괜찮아? 일은 안 힘들어?” 아닌 게 아니라 회사 다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몸은 벌써 축나고 있었다. 야근은 일상이고 날밤 새우는 날도 많았다. 주 52시간 업무 시간 제한 정책은 말뿐이었다. 밤새 사무실 전원만 차단돼 팀별로 24시간 카페에 가는 수고만 늘었다. 

“뭐, 다른 데도 똑같겠지” 명성과는 다른 실태에 적잖이 실망했지만 ‘신의 직장’에 먹칠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월급은 세겠지? 부럽다!” 그럼, 네가 당연히 부러워해야지. 아버지는 누누이 돈이 최고라고 말씀하셨다. “뭘, 나는 꿈을 이룬 네가 더 부러운걸!” 인사치레로 친구에게 답을 했다. “현실적으로 힘들기는 한데, 그래도 무대에 설 때는 여전히 행복하긴 해.”

한 끼 식사로 단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가격이다. 인터넷 후기를 샅샅이 뒤져 분위기도 맛도 최고라는 식당을 골랐다. 그녀와 처음 함께 하는 자린데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곳을 가면 실패하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누누이 말씀하셨다. “오빠 오랜만이네”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좋은 직장 들어간 거 맞긴 한가 봐, 여기 비싸잖아.” 괜스레 눈치가 보였던 이유는 자꾸 부자연스럽게 웃는 그녀 때문이었다. 음식이 나와도 예쁘다, 맛있다 말만 할 뿐 표정은 환하지 못했다. 음식은 시간을 두고 연달아 나왔는데 쥐똥 만큼씩 줘서 무슨 맛인지 통 느낄 수가 없었다. 남들은 맛있다고 난리였지만 갑갑하기만 했다. 혹시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에 그런 표정을 지은 걸까?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 보톡스 맞은 지 얼마 안됐어. 시간 지나면 괜찮아져.”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성형이 죄가 아닌 시대니까. “예전부터 꾸준히 맞아왔어, 한번 하면 계속해야 해서 턱이랑 코도 주사 맞았어. 연예인들 하는 곳에서 했는데 다들 돈으로 관리하는 거래. 몸매? 이것도 다 넣은 거지 뭐. 그래도 오빠는 이해하는구나. 예쁜 여자한테는 죽자 살자 달려들면서 성형했다 하면 실망하는 새끼들이 있어서......” 

굳은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연이어 하는 말에 신랄한 육두문자가 섞여 나오는데 점점 머리가 아득해졌다. “솔직해서 좋네, 하하.” 애써 생각해낸 말이 그녀에게는 칭찬으로 들렸나 보다. “솔직히 나는 결혼하면 일 그만두고 싶어. 직장 다니는 거 지긋지긋해, 남자가 어느 정도 돈 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녀는 노골적으로 돈 많은 남자를 향한 욕망을 드러냈다. “오빠 정도면, 나 먹여 살리기 어렵지는 않지?”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건 다 손에 넣었다. 꿈꿔왔던 직장에 다니고 있고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여자친구까지 생길 참이다. 하지만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자니 마음 한 구석이 찌르르하기까지 했다. 멀리서 볼 때는 직장도, 여자도 모두 아름다웠지만 막상 가까이서 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 모네는 백내장으로 고생하면서도 선명한 색감으로 수련이나 해돋이를 즐겨 그렸다. © flickr

모네는 백내장으로 고생하면서도 수련이나 해돋이를 즐겨 그렸다. 그런 상황에서 그렸으리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림은 선명한 색감과 생동감이 넘친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멀리 떨어져서 봐야 진짜 수련이나 해돋이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면 투박한 물감 덩어리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시선이 거리를 유지해야 꽃이나 해돋이로 보이게끔 하는 인상파 기법이다. 혹자는 이 거리를 ‘미학적 거리’라고 한다. 

열심히 살아온 지난 날들을 떠올리니 억울함에 질금질금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청승맞은 눈물을 닦으며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편집 : 조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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