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박달과 금봉’ 전설의 유래

▲ 황진우 기자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님아 /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나"

"도라지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 금봉아 불러 보면 산울림만 외롭구나"

충북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에서 백운면 평동리로 넘어가는 천등산(天登山)박달재. 해발 453m 높이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왼쪽으로 ‘박달과 금봉이의 전설’을 소개하는 동상이 있고 그 옆에는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가 서 있다. 그러나 지금의 박달재는 인근에서 가장 높은 천등산이 아니라 시랑산 자락을 넘어가는 고갯마루다.

▲ 박달재 고갯마루에 서 있는 박달이와 금봉이 동상. ⓒ 황진우

‘울고 넘는 박달재’가 종일 흘러나오던 고개

지금은 박달재 밑으로 38번 국도 터널이 뚫려 박달재를 찾는 사람은 탐방객이나 관광객들뿐이다.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대부분 차량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고, 마루에 오르면 종일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흘러나오던 곳이다.

박달재는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유행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다. 해방 직후인 1948년 가수 박재홍이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를 발표한 뒤, 가사에 담긴 서민적 정서가 공감을 얻어 애창곡으로 불리면서 박달재도 유명해졌고, 박달재에 서린 박달과 금봉이의 전설도 회자됐다.

그 옛날 박달이란 선비가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다 날이 어두워져 박달재 아랫마을에 묵게 된다. 여기서 금봉이라는 처녀를 만난 박달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혼인을 약속한다.

박달은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로 떠나고 금봉은 박달의 장원급제를 학수고대한다. 박달은 과거에 낙방해 금봉이를 볼 낯이 없어 돌아가지 못하고, 박달을 애타게 기다리던 금봉이는 기다림에 지쳐 저세상으로 떠나고 만다. 박달이는 그래도 혼인을 약속한 터라 금봉이를 찾아왔으나 사흘 전에 금봉이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박달은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며 박달재 고갯길을 오르다가 금봉이의 환상을 보고 와락 끌어안았으나 금봉이는 간데없고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다.

▲ 박달재 고갯마루에 서 있는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 38번 국도 터널이 뚫리기 전 서울을 오가는 차들은 대개 이 고갯마루에서 쉬어 가게 되는데, 종일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흘러나왔다. ⓒ 황진우

‘울고 넘는 박달재’가 발표돼 히트를 치고 애창되면서 박달과 금봉이의 애절한 사연도 박달재의 전설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박달재에는 금봉이가 없다. 전설이나 애절한 사연들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 가사가 적지 않은데 대부분 노랫말은 전설이나 사연을 바탕으로 지어진다. 하지만 ‘울고 넘는 박달재’는 가사가 먼저 만들어지고 노래가 유행하면서 없던 전설이 만들어졌다.

천하 요처 박달재, 거란군 물리친 전적지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나오고 애창되기 전까지는 박달과 금봉이 전설은 없었다. 기록이나 문헌을 보면 박달재는 <고려사>에 김취려 장군이 1217년 5천의 거란군을 물리친 곳으로 기록돼 있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박달재 내용이 나온다.

박달재의 ‘박달’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령한 나무를 뜻하는 신단수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학자들은 ‘박달’을 박달나무가 자라는 식생과 관계없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으로 해석했다. <정감록>을 봐도 ‘제천과 충주에 있는 천등산, 인등산, 지등산이 천하의 명당’이라고 쓰여있고 실제로 박달재에서 시랑산 정상을 향해 가다 보면 단군 비석이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많이 깃든 장소가 어떻게 남녀 사랑이 담긴 전설의 장소로 변했을까?

▲ 박달재 고갯마루에는 김취려 장군이 박달재에서 거란군을 격퇴했다는 내용을 담은 설명비가 서 있다. ⓒ 황진우

지금도 박달재에서 관광객들에게 박달재를 소개하는 문화해설사들은 “조선시대부터 유행한 박달과금봉의 전설 때문에 박달재라고 불리게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박달재 전설은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만들어진 뒤 만들어져 퍼진 ‘신야담’이다.

고갯마루서 헤어진 부부 이야기, 금봉이는 이광수 소설 주인공

‘울고 넘는 박달재’는 반야월 선생이 작사했다. 그는 1946년 공연을 위해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려고 박달재를 넘던 중 길가에 서서 손잡고 울고 있는 젊은 부부를 만나게 된다. 사연이 궁금해진 반야월 선생이 여성에게 물어보니 ‘남편이 서울로 돈 벌러 떠나는데 여기서 헤어지는 게 가슴 아파 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종일 그 부부의 사연을 생각하면서 노랫말을 만들게 되는데, 막상 만들려고 하니 부부의 이름을 몰라 가사에 넣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유행하던 이광수 소설 <그 여자의 일생>에 나오는 주인공인 ‘금봉’을 아내 이름으로 해서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랫말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후 박달재 전설은 ‘박달이와 금봉이’의 사랑 이야기로 전해졌다. ’박달재 전설의 형성과 ‘울고 넘는 박달재’’란 논문의 저자인 세명대 미디어 문화학부 권순긍 교수는 “박달과금봉이의 전설은 노래가 유행한 뒤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말했다. 권교수는 “박달재를 매개로 ‘양반 선비를 사랑한 평민 처녀’ 설화의 한 유형이 전승돼 오다가 반야월 선생이 ‘울고 넘는 박달재’를 작사한 1946년 이후 노래가 유행하면서 거기에 맞춰 부대 설화로 전파되었다”고 말했다.

▲ 세명대 권순긍 교수가 박달재 전설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 황진우

노랫말 따라 근래에 만들어진 전설

권 교수는 “단양의 온달산성처럼 유래에 해당하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고, 박달재 지명이 문헌에 기록돼 있지만 전설과 관련한 주인공의 무덤이나 떨어진 장소 등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전설로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현재 접할 수 있는 <내 고향 전통 가꾸기>에도 ‘박달재 전설은 구비 전설의 틀을 빌려 새롭게 만들어진 ’근대전설’ 또는 ‘신전설’’이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박달재 전설’뿐 아니라 예전부터 전승되어 온 많은 전설 중에는 근대에 들어와 새로 만들어진 ‘근대전설’이 많다. 대표적인 ‘근대전설’이 김동인과 윤백남의 <야담>과 <월간야담> 소재 전설이다. 이 전설은 1930년대부터 전승된 설화나 새로운 소재를 발굴해 회고조 통속물로 만들어낸 신야담이다. ‘신야담’에는 민족의 정서나 현실의 긍정적 지향, 또는 통속적 정서를 담았다. ‘박달재 전설’에는 여성수난의 대표로 ‘금봉’을 대입함으로써 눈물샘을 자극했다. 하지만 일제에 고통받는 국민의 정서를 자극한 ‘아리랑’만큼 발전하지는 못했다.

▲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박달재 입구. ⓒ 황진우

현재 접할 수 있는 ‘박달과 금봉’의 실존에 관한 자료는 노래가 만들어진 1946년 이후 형성된 이야기뿐이다. 박달재 자체 전설에 관한 문헌도 노래가 만들어진 이후에 나온 것들뿐이다. 이것들은 ‘울고 넘는 박달재’가 큰 인기를 얻고 박달재가 문화콘텐츠로 많이 사용되자 박달과 금봉의 사랑을 다룬 새로운 구비전설의 틀로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권 교수는 "당시 인기가수였던 박재홍이 이 노래를 불러 유명해졌고 1950년대 이후엔 ‘울고 넘는 박달재’, ‘눈물의 박달재’ 등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며 "이후 박달재가 대중가요, 영화, 가요제 등 다양한 콘텐츠에 사용됨으로써 새롭게 형성된 전설도 널리 전파되었다"고 말했다.


편집 :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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