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쌍용차 해고자 복직, 26명 희생자들은?

쌍용자동차 노사가 지난달 14일 해고자 전원 복직에 합의하면서 남은 해고자 119명이 9년여 만에 자기들 일자리로 돌아간다. 이들은 모두 복직하지만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엄인섭, 황대원, 임무창, 이윤영, 김주중……

2009년 6월 대량해고로 일터에서 쫓겨난 뒤 생활고와 후유증 등으로 극한적 선택을 하거나 병마 등으로 세상을 떠난 스물여섯 쌍용차 해고자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 복직과 재취업을 위해 몸부림치다 죽음의 길로 가버린 그들을 떠올리며, 조금만 더 빨리 해법을 찾았다면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죽음

쌍용자동차 노사가 해고자 전원 복직에 합의하기 불과 석 달여 전인 지난 6월 28일, 본인은 물론 다른 동료들의 복직을 위해 열심히 활동해왔던 김주중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씨는 숨지기 며칠 전까지도 2009년 파업 진실규명과 관련한 인권침해조사위원회 조사에 참여하고, 공장 앞 1인 시위 릴레이와 촛불문화제 활동도 했다. 그랬던 그가 아직은 회사로 돌아가는 일이 멀고 어렵기만 한 길이라 생각했는지, 전원 복직 합의 석 달여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해버린 것이다. 그는 부인에게 남긴 유서에서 ‘못난 남편 만나 고생만 시키고... 빚만 남기고 간다’고 적었다.

▲ 9월 21일 금요일 평택공장 본관 5층 대회의실에서 쌍용자동차 사측과 노조가 119명 전원 복직 합의 조인식을 열고 해고자 복직에 관한 일정을 마쳤다. © 금속노조쌍용자동차 페이스북

주변에서는 그의 죽음을 생활고 탓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움쩍도 하지 않는 이 사회의 외면과 무관심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란 의견들이 많다. 그의 부인 신상진씨는 해고자 전원 복직이 합의된 뒤 <단비뉴스>와 통화하면서 “다들 잘 되셔서 좋다”면서도 “당장 제 옆에 있던 분은 안 계시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회사가 좀 더 빨리 결정을 내렸으면, 이런 선택까지는 하지 않았겠죠”라고 덧붙였다. 쌍용자동차 노사는 지난 2015년 12월 단계적인 해고자 복직에 합의했지만 3년간 복직된 사람은 45명에 불과했다. 신씨는 “회사가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라며 “그분은 계속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복직이 안 되니까 좌절하고 또 좌절한 것”이라고 했다.

‘쌍용차 해고자’ 낙인...극단적 선택 강제해 희생 늘어

우리 사회가 쌍용차 해고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숨통을 터주었더라면 마지막 복직자 숫자가 119명이 아니라 죽은 26명을 합쳐 145명이 됐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쌍용차 대량 해고 3년 뒤인 2012년 3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윤영씨는 쌍용차 해고 경력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녀 재취업이 막히자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는 해고 뒤 쌍용차 공장이 있는 평택에서 1년간 구직 활동을 했으나 그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쌍용차 공장이 있는 곳이라 그런 모양이라며 김포와 인천 등으로 옮겨서 어렵게 일자리를 구했는데, 회사가 쌍용차 출신임을 알아내고는 쫓아내 버렸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은 “(이윤영씨가) 술만 마시면 주변에서 빨갱이라고 한다며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한 달 전쯤 ‘평택에 있는 중소기업 면접을 봤다’고 좋아했는데, 쌍용차 출신임이 드러나 결국 재취업을 못 했다”며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김 지부장은 “2009년 대량 해고 이후 재취업에 성공한 노조원은 한 사람도 없다”며 “회사들이 어디서 어떻게 알아내는지 쌍용차 출신은 바로 찾아내 배제했다”고 말했다.

부인 이어 남편까지 극단적 선택...남은 가족은 어디서 보상받나

이들에 대한 배제와 무관심은 그들의 가정까지 파괴했다. 대량 해고 직후인 2010년 4월 25일에는 쌍용차 노조원 임무창씨의 부인 서모씨가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임씨는 무급휴직 상태였는데, 다른 일자리 찾기도 쉽지 않고 일용직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생활비 충당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차를 팔고 아이들 돌반지와 결혼예물까지 팔았지만 복직이나 재취업 희망은 보이지 않고 더 이상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한 듯 부인이 세상을 저버린 것이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채 안돼 남편 임씨도 심근경색으로 부인 뒤를 따랐다. 동료와 친지들에 따르면 임씨는 숨지기 하루 전 “애들 등록금만 생각하면 가슴이 숮덩이가 된다”며 친구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임씨는 무급휴직 기간이 끝나 2010년 8월에 복직해야 하는데 회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렸다. 당시 임씨의 통장 잔고는 4만 원이었고 카드빚이 150만 원 이상 됐다. 고등학생이던 아들과 중학생 딸만 남은 집안에는 쌀 한 줌과 라면 한 봉지만 남아 있었다. 2011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그 남매는 “네 식구의 행복을 앗아간 회사를 생각하면 아직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 9월 10일 전남 여수시 여수시법원 앞에서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노조가 박보영 전 대법관이 2014년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판결을 파기환송한 데 대한 해명과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 금속노조쌍용자동차 페이스북

이들 말고도 쌍용차를 타면 해고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차까지 바꾸고도 결국 해고돼 마지막에는 신경성 스트레스로 숨진 사람 등 해고 후유증에 따른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의 유족에게는 해고자 전원 복직이란 노사 합의가 더 가슴 아프게 절망감을 던져 줄 수밖에 없을 듯하다.

공식발표 없는 희생자 보상, 노사 양측 주장 엇갈려

이런 아픔이나 안타까움에도 이번 쌍용차 노사합의에서는 이들 26명의 희생자 보상과 관련한 합의 내용은 공개적으로 발표된 것이 없다. <단비뉴스>가 노사 양쪽에 확인한 결과 주장이 엇갈린다. 김정욱 쌍용자동차 노조 사무국장은 최근 숨진 김주중씨 보상 문제와 관련해 “현재 협의가 진행 중”이라며 “이미 고인이 돼 본인이 회사로 돌아갈 수는 없는 만큼 자녀를 특별채용 하는 방향으로 회사 측과 합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회사 측 차기웅 홍보 2팀장은 “전달받은 바 없다”며 “노조 측에서 주장할 수는 있지만 아직 문건화 한 건 없다”고 했다. 나머지 다른 희생자들에 대한 유족 채용 내용은 추가 확인되는 게 없다.

▲ 7월 3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설치된 쌍용차 분향소는 김주중씨가 사망한 지 79일이 지난 9월 19일 저녁 노조에 의해 자진 철거됐다. © 조승진

앞서 쌍용차 노사는 지난 2015년 12월 30일 해고노동자 단계적 복직에 합의하면서 희망기금을 조성해 유족과 복직대기자를 지원해 주기로 했다. 차기웅 홍보 2팀장은 “2015년 12월 30일 합의 이후 2016년 6월에 희망기금을 일괄 지급했다”며 “정확한 액수는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노조 측에 일괄 지급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는지는 모른다”고 덧붙였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를 위한 심리 치유센터 ‘와락’ 권지영 대표는 “희망기금을 갖고 해고자들 생계지원금과 유족 위로금을 지급했다”며 “수령을 거부하거나 무연고자인 경우를 제외하고 총 18명 유족에게 1250만 원씩 지급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시적인 위로금만으로 희생자들의 보상이 이뤄질 수는 없다. 노사 양측이 지금이라도 적절한 보상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그들의 희생을 헛된 것으로 귀결되지 않게 하는 것이란 의견이 많다.


편집 : 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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