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추석에 딸아이와 나눈 대화

▲ 조승진 기자

딸아이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표현이 서툴렀을 뿐 누구보다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채워주지는 못했지만 배우고 싶다는 건 무리해서라도 하게 해줬다. 여느 직장인처럼 굴욕적인 일에 때려치우고 싶은 날이 많았다. 그래도 버텨온 건 딸 때문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던 걸까? 딸아이는 크게 속 썩이는 일 없이 커 줬다. 이름 있는 대학을 나오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간 딸은 내 큰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그런 딸아이가 내게 배신을 안겼다. 나이가 차도 결혼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아 은근히 걱정스러웠지만 만나는 사람이 있다길래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결혼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겠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애인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혼자 산다는 걸까? “아빠, 우리 둘 다 비혼주의자야.” 딸은 결혼은 선택이라며 남자친구와도 합의했다고 한다. “걔 말고 다른 애 만나봐, 결혼할 사람이 아니라서 결혼 생각이 안 드는 걸 수도 있어.” 침착하게 말했지만 딸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이, 그게 아니라니까. 나 지금 남자친구 진짜 사랑해, 그래도 우리 결혼 안 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본능이다. 그렇기에 평생 함께하는 걸 약속하는 결혼을 사랑의 결실이라 표현하지 않는가. 그런데 딸은 진짜 사랑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겠다니! 여자한테 손해뿐인 제도라며 되레 큰소리친다. “결혼한 친구들 보면 하나도 안 행복해 보여. 직장은 똑같이 다니는데 남편은 집안일 돕는다고 생각한대. 따지고 보면 돕는 게 아니라 같이 해야 되는 거 아냐? 시댁 스트레스도 장난 아닌가 봐. 이제 곧 명절인데 휴일 길다고 시댁에 오래 있어야 한대. 걔들은 벌써 명절 얘기만 나오면 힘들어해.”

▲ 비혼을 선택하는 사람중 대다수는 결혼 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한다. ⓒ flickr

딸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믿어지지 않았다.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집안일은 여자가 하는 일이니 남편이 돕는다고 생각하는 게 뭐가 이상한 걸까? 직장에서 시달리는 일은 여자보다 남자가 더 클 텐데, 그러니까 남자들이 돈도 더 많이 받는 거 아닌가. 그리고 시댁도 한 가족이라 생각하고 싫은 소리 들어도 좋게좋게 넘어가고 나중에 친정 오면 되는 건데 가족 일을 수학적으로 나눠야 하나. 

“결혼해서 애 안 낳기로 한 애들도 많아, 아빠. 애 낳으면 여자 인생은 진짜 없는 것 같아. 회사에서 눈치 주지, 버텨도 애 맡길 곳 없지, 퇴사하면 경력단절로 받아주는 곳도 없고.... 남자들은 그런 일 안 겪어도 되잖아. 그리고 애 키우는 데 교육비까지 다 따지면 진짜 억 소리만 나온대. 차라리 그 돈으로 내 인생 사는 게 이득 아냐?”

요즘 젊은 것들은 이기적이어서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는다더니 그게 내 딸일 줄 몰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솔직히 아빠도 집안일 안 하잖아, 엄마도 일하는 여자였는데 말이야. 그리고 나 먹고 살기도 힘들어. 태어나면 제 숟가락 물고 나온다 해도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야. 나 그런 대물림 하기 싫어.”

딸 아이의 말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집안일 안 한 나를 비난하다니, 그리고 자기 처지를 대물림 하기 싫다니! 지금껏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저리 말할까? 딸을 위해서라면 슬퍼도 기쁜 척 아파도 강한 척하며 직장에서 버텨왔다. 딸애가 다니는 직장 월급 정도면 우리 때보다 애를 더 잘 키울 수도 있다. 딸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 사랑해도 결혼하지 않고 결혼해도 애 안 낳는다는 게 뭔 말인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특히 그게 자식이라면 모두가 희생하며 산다. 그런데 딸 아이는 당연하다고 여길 일을 불합리하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딸은 가짜 사랑만 했나 보다.


편집 : 조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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