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몰카, 조심하세요!”

▲ 장은미 기자

지난 2016년 서울경찰청이 지하철에 이런 벽보를 붙였을 때, 인터넷 게시판에는 뜻밖에 냉소적인 의견들이 쏟아졌다. ‘몰래 찍는데 주의를 어떻게 하나’ ‘잠재적 피해자에게 조심하랄 게 아니라 몰카범에게 엄벌을 경고하라’ ‘몰카범 잡는 데 신경이나 좀 써라’ 등의 반응이었다. 가해자를 적극적으로 잡아내 단죄하는 대신 피해자의 ‘주의’ ‘조심’을 요구하는 경향은 우리나라 공권력이 성폭력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가해자의 행위와 동기 등을 중심으로 범죄성을 가려내기보다 ‘충분히 저항했나’ ‘평소 행실에는 문제가 없었나’ 등 ‘피해자의 책임’과 ‘피해자다움’을 살피는 데 더 집중하는 것이다.

가해자 대신 피해자를 심판한 재판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김지은 전 수행비서를 ‘위력에 의해 간음했는지’ 등을 다툰 1심은 이런 재판의 전형이었다. 보도된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피고인 안희정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김지은씨가 ‘거부 의사를 너무 약하게 표현했고’ ‘사건 후에도 식당 예약 등 업무를 태연히 수행했으므로’ 위력에 의해 성폭행당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반면 피고인 안희정에 대해서는 ‘김지은에게 존댓말을 쓴 적도 있고’ ‘젊은 사람들과 맞담배도 피우던’ 수평적 성품이므로 위력을 가졌으되 행사할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김지은씨는 신분보장이 안 되는 별정직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예스(Yes)를 하라’고 훈련받은 수행비서로서, 도지사이자 유력 대선주자인 그에게 “아니요,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한 게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부였다고 주장했다. 도지사의 심기를 거슬리면 당장의 일자리도, 직업적 미래도 박탈당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업무를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좋은 대학 나오고 결혼도 해본 사람이 억지로 당했을 리 없다’고 일축했다.

▲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1심 재판에서 무죄선고를 받자 여성계, 법조계 등에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심판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 JTBC 뉴스룸

반면 성관계 후 ‘미안하다’ ‘잊어라’ 등의 문자를 보냈고, 도지사직을 사퇴하며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라고 페이스북에 썼던 안희정 피고인에게 재판부는 제대로 따져 묻지 않았다. 페이스북에 쓴 말을 재판에서 왜 번복했는지, 합의에 의한 관계라면 사과 문자는 뭐고 ‘애정 관계’의 증거는 왜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는지. 재판부는 번복되거나 맥락에 맞지 않는 가해자의 말은 의심 없이 믿은 반면, 일관되게 진술해온 피해자의 말은 ‘피해자다움’의 기준에 어긋난다며 배척했다.

권력형 성폭력을 단죄하지 못하는 사회

로스쿨 학생들로 구성된 전국 법학전문대학원 젠더법학회연합은 이 판결에 대해 “위력에 의한 간음 사건에서 피해자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는지를 문제 삼지 않은 1998년 대법원 판례보다 후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또 “판사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을 이유로 광범위한 품행 심판을 진행했다”며 ‘재판부의 성인지 감수성 결여’를 꼬집었다. 검사 출신인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피고인은 새벽 2시에도 피해자에게 ‘담배’ ‘맥주’ ‘모기향’ 등 문자로 지시를 했고 몇 분 내 답이 없으면 ‘어허 문자 안 보네’ 등 불호령을 했다”며 한밤에도 심부름을 해야 하는 비정규직 비서와 도지사의 위력관계를 재판부가 외면했다고 성토했다.

여성계는 이번 판결이 ‘권력형 성폭력의 근절’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퇴행시키지 않을까 걱정한다. 여성 비서를 야밤에 담배까지 나르는 ‘몸종’처럼 부리다가 손쉽게 성적 욕구도 채웠던 정치인, 다른 여성에게서도 비슷한 폭로가 나와 ‘상습성’이 의심되는 그를 법정이 단죄하지 못한다면 정의는 어떻게 세워야 하나. 법이 미비해서가 아니고, 엄연히 처벌 조항이 존재하는데도 재판부가 사건 심리와 법리 해석을 자의적으로 한 마당이니 말이다.

피해자 김지은씨는 잔인한 ‘2차 가해’에 ‘죽음을 생각할 만큼’ 만신창이가 됐다고 한다. 김씨가 안 전 지사를 좋아했다거나, 피해자의 심리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암시하는 피고 측 증인들의 일방적 주장이 여과 없이 언론을 탔다. 안 전 지사 측근들이 김씨 관련 뉴스에 노골적인 악성댓글을 달다가 입건되기도 했다. 이런 ‘공작’ 탓인지 김씨를 ‘남녀관계에 기대를 걸었다 잘 안 되니 미투를 악용한 여자’로 보는 사람들도 꽤 있다. ‘미투 운동’에 용기를 얻어 성폭력 피해를 고발했던 사람들, 혹은 고발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한 악몽이 없다.

젠더법학회연합은 안희정 판결을 비판하는 성명에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인종차별과 성차별 때문”이라는 영국 작가 사라 아메드의 말을 인용했다. 재판부가 지금처럼 가해자의 관점에서 피해자를 검증한다면 ‘증거가 없으니 무죄’라는 무책임한 판결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곧 시작될 2심은 분명 달라야 할 것이다.


편집 : 나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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