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임 칼럼]

▲ 제정임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지난해 2월,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고인의 자녀와 손자손녀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가족, 신세계그룹의 이명희 회장과 정용진 대표, 한솔그룹의 이인희 고문 등이 대외 행사에 함께 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들이 평소 '조용하게' 움직이는 삼성, CJ, 신세계, 한솔 등 '범 삼성' 계열사들의 매출은 지난해 약 285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약 4분의 1 규모다. 이들이 '가족회의'를 열면 한국 경제를 들었다 놓을 수도 있다.

정부는 특혜, 의회ㆍ사법부는 면죄부

고 정주영 회장이 일으킨 '범 현대'는 어떨까. 현대기아차, 현대, 현대중공업, KCC 등 고인의 형제와 자녀 일가가 경영하는 그룹들의 매출은 약 200조원으로 GDP의 5분의 1 규모다. 역시 가족회의로 경제를 흔들 만한 수준이다.

대기업그룹 중에서도 가족구성원이나 일가친척이 지배하는 기업집단을 우리는 재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미 덩치 큰 재벌들이 몸집을 더 불리는 속도가 눈 돌아갈 지경이다.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등 10대 재벌의 계열사 수는 2007년 361개에서 올해 581개로 4년 만에 무려 60%가 늘었다. 자산과 매출 증가 속도도 눈부시다. 이젠 '문어발' 보다 '지네발'이란 비유가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

지네발 재벌은 때로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다. 협력업체의 납품단가를 후려치고, 기술과 인력을 빼가고, 계열사간 일감 몰아주기로 시장을 장악해 중소기업들의 숨통을 조인다. 기업형수퍼마켓(SSM) 등을 통해 동네 떡집, 치킨집, 채소과일점, 구멍가게 같은 자영업자의 밥그릇도 위협한다. 매몰차게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돌리면서 근로자들을 절망적인 처지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재벌의 금고엔 돈이 넘치는데 중소기업, 자영업자, 근로자는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낙수 효과', 즉 '대기업이 잘 되면 모두가 덕을 본다'는 이론을 내세워 특혜를 몰아준 역대 정부, 특히 출자총액제한제 등 규제를 확 풀어준 이명박 정부의 책임이 크다. 정치자금을 받아먹고 벙어리가 된 국회의원들, 재벌의 불법행위에 집행유예 등의 '정찰제 판결'을 남발한 사법부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언론은 어떨까. 정부와 의회, 사법부를 떳떳하게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재벌의 하도급 횡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언론이 심층취재를 통해 구체적으로, 질기게 고발했다면 공정거래위원회와 검찰이 칼을 뽑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부와 국회가 재벌의 팽창을 막는 마지막 빗장까지 열어젖힐 때, 날을 세워 위험성을 경고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SSM의 횡포에 자영업자들이 울부짖고 부당한 해고에 노동자들이 항거할 때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렸다면 재벌이 그렇게 일방통행할 순 없었을 것이다. 수 조원의 차명자금을 숨기고 1,000억원 넘게 탈세한 재벌 총수에게 집행유예와 사면이 내려졌을 때, 언론이 '법 앞의 평등'을 제대로 따졌다면 이렇게까지 정의가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언론은 감시ㆍ비판 기능 제대로 했나

거대 재벌 하나가 한 신문사 광고매출의 10%를 넘게 좌우하기도 하는 구조에서 언론이 재벌의 눈치를 안 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삼류신문 뉴욕타임스를 세계 최고 수준의 권위지로 키운 사주 아돌프 옥스는 "어떤 이해관계로부터도 자유롭게, 오직 독자를 위해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 장기적인 재무전략으로 최선"이라고 말했다. 재벌의 잘못을 비판하는 대신 '광고인지 기사인지 헷갈리는' 정보를 남발하는 언론은 분노에 찬 국민의 시선을 느껴야 한다. 도적을 막으라고 파수견(watchdog)을 키우는데, 고기조각을 탐내 도적의 애완견 노릇을 한다면 주인이 그냥 놔두겠는가.
 


*  이 칼럼은 한국일보 8월 16일자 <아침을 열며>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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