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이주노동자’

눈에 한 번 씐 콩깍지는 잘 벗겨지지 않는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사랑에 빠지면 그 대상이 되는 이가 무슨 행동을 해도 사랑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사랑할 이유만 찾기 때문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한 번 미운 사람이 다시 좋아지지 않는 까닭은 계속해서 미워할 이유만 찾기 때문일 거다.

얼마 전 청량리역 근처를 지나면서 누군가 공사장 철벽에 빨간 래커로 ‘짱깨새끼들’이라 써놓은 걸 보았다. 중국인을 콕 찍어 혐오를 드러낸 단어였다. 분노에 가득 찬 듯 휘갈겨 쓴 문장이 이어졌다. "중국 노동자 때문에 대한민국 노동자들이 너무 힘드니 정부가 빨리 대책을 세워라." 중국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겼으니 분하다는 소리다. 그런데 중국인 노동자가 한국인 일거리를 빼앗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 청량리역 공사장 가림막에 중국 노동자를 혐오하는 표현과 한국 노동자를 위한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는 글이 적혀있다. ⓒ 조승진

우리 법이 내국인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외국인 근로자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은 내국인을 외국인보다 우선 채용하게 되어 있다. 외국인 노동자는 내국인 채용이 여의치 않을 때만 허가된다. 한국은행이 2017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외국인 취업자는 2~4%에 불과하다. 보통 외국인 노동자가 취업한 곳은 우리 국민이 일하기 꺼리는 3D업종이다. 노동시장에서는 우리 국민과 외국인 노동자 사이에 밥그릇 싸움은 일어나기 힘들다.

문제는 외국인 노동자가 우리 국민을 위협한다는 식의 보도가 인식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지난 6월 3일 "70대 김 씨는 오늘도 빈손으로 돌아갔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2017년 9월 18일에는 "불법체류자 천국 대한민국...외국인 노동자가 우리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MBC 역시 지난해 2월 10일 "외국인 근로자 급증, 일자리 쟁탈전"이라는 리포트를 내보냈다. 세 기사 모두 건설인력시장에서 외국인 노동자 때문에 한국인이 피해를 본다는 뉘앙스다. 하지만 전문을 읽어보면 한국 젊은이들이 일용직 노동을 기피했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2017년 2월 10일 MBC는 외국인 근로자 급증으로 한국 노동자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식의 보도를 했다. © MBC

예멘 난민에게 ‘불법 취업자’ 틀을 씌워 보도하는 보수언론도 근거 없이 외국인 노동자 혐오에 편승하고 있다. 난민이 조국을 떠나는 엑소더스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거나 괴롭힐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 조상들이 일제 식민지에서 견디다 못해 망명하다시피 외국으로 떠났던 것은 불과 백년도 안 된 근세사다.

마이클 셔머라는 과학자는 인간은 현실이 극도로 괴로울 때 ‘나를 위로한다’라는 느낌이 든다면 비판 없는 믿음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뇌가 오류를 일으키기 때문인데 이에 따라 미신 같은 것에 빠진다고 설명했다. 외국인 노동자 때문에 삶이 어려워졌다는 주장은 불안을 덜어주는 주술일 뿐이다. 한번 미워했더라도 다시 그들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이제는 우리 눈에 잘못 씐 콩깍지를 벗겨내야 한다.


한국이 극심한 갈등사회가 된 것은 자기만 이롭게 하려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발상에 너무 빠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좌우, 여야, 노사, 세대, 계층, 지역, 환경 등 서로 간 갈등 국면에는 대개 인간, 특히 강자나 기득권층의 자기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간이 넓어져야 할 때입니다. 그런 생각과 풍자가 떠오르는 이는 누구나 글을 보내주세요. 첨삭하고 때로는 내 생각을 보태서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봉수 교수)

편집 : 이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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