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 ㉑ 노동과 보상의 역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으로 가보자. 1794년 정월부터 1796년 9월까지 2년 8개월 짧은 기간에 완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70대 중반 영의정 채제공의 사심 없는 현장감독에다 정조가 100년에 한 번 나올 재상감으로 칭송한 조선 천재 정약용의 설계도 ‘성설(城說)’, 그가 발명한 거중기(擧重機) 공이 크다. 하지만, 이것 갖고는 2% 부족하다. 정조의 명으로 김종수가 편찬한 ‘화성성역의궤’에 답이 들어있다. 공사 일정과 자재 등 화성 건설의 모든 것이 담겼다. 돌덩이 18만1600개, 벽돌 69만5000개, 철물 55만9000근…. 그중 눈에 띄는 대목은 전체 경비 87만3520냥과 노임지급 기술자 1만1820명. 임금노동자들이 제때 돈 받고, 일사천리로 공사를 진행한 결과였다. 지금 대한민국의 화두는 노동이다. 주 52시간 노동을 실시한 지 한 달이 지났고, 최저임금 인상 찬반논란도 거세다. 여기다 노동과 정치를 연결했던 진보정치 선구자 노회찬 신드롬까지. 인류 역사를 아로새기는 대형건축에서 노동과 그에 대한 보상풍습은 어땠는지 살펴본다.

▲ 이집트 카이로 근처 기자에 있는 쿠푸 피라미드. B.C. 2570년경 10만 명의 임금노동자를 20년간 동원해 건축했다. ⓒ 김문환
▲ 만리장성 팔달령 코스. 맹강녀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강제노역을 통해 건축됐다. ⓒ 김문환

수원화성-정확한 노임지급, 경복궁-강제노동 자재 착취

수원화성 5.4㎞ 성벽 안에는 성문인 화서문, 창룡문과 그 옆의 초소 공심돈, 개울 위 화홍문과 정자 방화수류정, 지휘소인 서장대와 훈련장 연무대…. 실용적 건축, 예술적 디자인,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건축사의 백미다. 정조가 당쟁에 휘말려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 묘 영우원(永祐園)을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자리)에서 1793년 화산(현 화성시 안녕동)으로 옮겨 융릉(隆陵)이란 왕릉으로 격상시키며 그 옆에 조성한 신도시 화성. 우리 역사에서 대형 공사는 화성처럼 임금노동자가 담당했을까?

화성과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경복궁 근정전으로 가보자. 1392년 많은 고려 충신을 죽이고 들어선 조선은 흉흉해진 개성 민심을 뒤로하고 1394년 경복궁을 지어 한양으로 천도한다. 하지만, 200여 년 만인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탈출하자 성난 민중 손에 경복궁은 불타고 만다. 폐허만 남았던 경복궁을 1868년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 차원에서 재건했다. 취지는 정조의 화성과 비슷하지만 과정은 달랐다. 비용조달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이라는 반강제 기부금을 받고, 벼슬 팔이 매관매직도 모자라 당백전(當百錢)이라는 돈을 마구 찍어 경제를 무너트렸다. 1866년 화재로 자재가 불탄 뒤에는 사유지 목재를 강탈하고, 강제 부역(賦役)을 남발해 민심을 잃었다. 동양에서 대형공사는 이렇게 강제적이었을까?

B.C. 3세기 중국 최대 건축 만리장성 강제노동, ‘맹강녀(孟姜女)’ 고사(故事)

중국 수도 북경(北京) 북쪽 교외 만리장성(萬里長城) 팔달령(八達嶺) 코스로 가보자. 차로 한 시간 거리다. 수도를 이민족 침략지역에 이리도 가깝게 건설하다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한족의 원래 무대는 황하 유역 서안과 낙양, 은허. 즉 섬서성과 하남성이다. 북쪽 이민족이 기세를 올릴 때면 수도를 양자(揚子)강 유역 남경(南京)으로 옮겼다.

북쪽 수도 북경이 중국 전체 수도가 된 것은 13세기 중국을 정복한 몽골 지배기다. 이제 의문이 풀린다. 기마민족이 중국을 접수했으니, 북쪽 변경지대라는 개념이 사라진 것이다.

전 세계 탐방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팔달령 코스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몽골을 몰아내고 재침을 막기 위해 15세기 대대적으로 보수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그 기원은 춘추전국시대 각국이 독자적으로 쌓은 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B.C. 221년 전국 시대를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가 장성을 하나로 연결할 때 대대적인 강제노역이 이뤄졌다.

맹강녀 고사는 그때 얘기다. 맹(孟)은 본부인 소생이 아닌 큰 자식을 가리킨다. 강(姜)은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왕족과 귀족의 성씨, 여(女)는 딸자식이다. 그러니 강 씨 집안 서녀(庶女) 가운데 큰딸이란 의미다. 맹강녀의 남편 범기량(范杞梁)이 만리장성 확충공사에 끌려가 3년간 소식이 끊겼다. 물어물어 현장에 온 맹강녀가 구슬피 울자 성벽이 무너지며 이미 죽은 남편의 해골이 드러났다는 대목에서 강제노역과 열악한 처우의 편린이 읽힌다. 무거운 돌덩이를 나르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유명을 달리한 인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물은 없을까?

▲ 신아시리아 제국 세나케립 왕의 니네베 궁전 공사현장 부조. 감독관이 매를 들고 때리는 모습을 담았다. B.C. 8세기. 대영박물관. ⓒ 김문환
▲ 룩소르 왕비의 계곡에서 발굴한 결근에 관한 무덤 공사 노무일지. B.C.12세기.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 이집트 20왕조 람세스 3세 무덤 공사 노동자 파업 파피루스. B.C.12세기.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B.C. 8세기 신아시리아 제국 궁전 건축, 매 맞는 강제노동자 조각 남겨

런던 대영박물관 1층 이집트 유물 전시실 안쪽으로 메소포타미아 유물전시실에 답이 기다린다. 국군 자이툰 부대가 파병됐던 이라크 모술 티그리스 강 상류 니네베(Nineveh)에서 가져온 궁전 부조(浮彫)를 보자. 니네베는 신아시리아 제국 세나케립(재위, B.C. 705∼B.C. 681년) 왕이 발전시킨 수도다. 세나케립은 당대 지구촌 최강대국 위상이 묻어나는 최고의 궁전을 세우면서 건설장면을 궁전 벽에 부조로 새겼다. 1849년 영국의 외교관이자 역사학자던 레어드(A H Layard)는 땅속에 묻혔던 세나케립 궁전을 찾아낸 뒤, 벽에 새긴 부조를 뜯어 1842년 완공한 현재의 대영박물관으로 옮겼다.

길게 늘어선 부조를 찬찬히 살펴보자. 채석장에서 돌을 캐 나르는 고된 작업풍경에 눈길이 멈춘다. 감시 병사들의 매서운 눈초리 아래 강제노역에 종사하는 인부들의 힘겨운 노동이 잘 묻어난다. 대형 지렛대와 밧줄을 이용해 대형 라마수(Lamassu·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소나 사자의 몸집을 가진 메소포타미아 수호신) 조각을 나르는 대목에서는 병사에게서 매질을 받는 인부의 안쓰러운 장면도 보인다. 고대사회 대형 공사현장의 무너진 인권 실상이 생생히 전해진다. 그렇다면 고대 건축은 이렇게 강제노역과 매질의 혹독한 조건 아래 이뤄졌을까?

B.C. 26세기 이집트 쿠푸 피라미드, 임금 노동자 10만 명 20년 건축

고대 건축의 금자탑, 이집트 카이로 근교 기자 쿠푸 피라미드로 가보자. 미국 대공황 시절인 1931년 뉴욕에 102층 381m 높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나올 때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높고 큰 건축물이었던 쿠푸 피라미드. 높이 145.6m, 밑변 230m의 거대 무덤이다. 사각뿔의 4면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경사 각도는 51.3도로 가파르다. 2.5∼10t짜리 화강암을 무려 230만 개나 쌓아 만들었다. 지금은 떨어져 나갔지만, 겉은 대리석 타일로 반짝였다. B.C. 3세기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인들이 정한 7대 불가사의의 으뜸, 쿠푸 피라미드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B.C. 2570년 전후다. 단군 할아버지가 나오시기 훨씬 전이다. 피라미드를 매 맞는 강제노역자들이 피땀으로 쌓았을까? B.C. 5세기 쿠푸 피라미드를 탐방한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10만 명이 3개월씩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축했다고 적는다. 노예나 전쟁포로의 강제노역이 아니다. 천문학에 과학기술을 총동원한 쿠푸의 기념비적 마그눔 오푸스(Magnum Opus)는 임금노동의 산물이다.

쿠푸 피라미드가 만들어지고 800여 년이 흘러 B.C. 1772년경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가 바빌론에서 함무라비 법전이 선포된다. 총 44줄 28구절의 282개 조항 가운데, 246개 조항이 해독됐다. 놀랍게도 50%는 계약과 건축에 관한 내용이다. 황소 한 마리를 끄는 노동자나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의 임금 등을 다룬다. 인류 역사에서 노동과 그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하는 관행은 역사시대 초기 풍습이었다. 이에 대한 증거를 더 찾아보자.

B.C. 12세기 이집트 룩소르 ‘왕비의 계곡’ 파라오 무덤 공사 노무일지

이탈리아 북부 공업 도시 토리노.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중세 이후 사보이 왕국의 수도로 번영했다.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됐을 때, 아직 교황청 관할 하에 있던 로마 대신 4년간 수도였을 만큼 이탈리아 중심도시다. 월드 스타 호나우두가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새 둥지를 튼 유벤투스 홈구장 도시라면 이해가 더 빠르다.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은 1824년 사보이 왕국 외교관이자 고고학자 드로베티(B M M Drovetti)가 수집한 유물에다 이탈리아의 걸출한 이집트 고고학자 스키아파렐리(E Schiaparelli)가 1903년 이후 발굴한 진귀한 유물을 다수 소장 중이다. 특히, 1822년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한 프랑스의 샹폴리옹(J F Champollion)이 1824년 박물관 개관을 기념해 이곳을 찾아 많은 문서를 해독하며 유명세를 치렀다.

눈길을 끄는 작은 돌조각 3개를 보자. 이집트 19왕조 세티 2세(재위 B.C. 1199∼B.C. 1193년)의 어린 아들 시프타(재위 B.C. 1193∼B.C. 1187년)에 이어 왕비 토스레트(재위 B.C. 1187∼B.C. 1185년)가 파라오로 있던 시기 유물이다. 스키아파렐리가 룩소르 왕비의 계곡(Valley of the Queens)에서 발굴한 이 석회암 조각은 신관(神官)문자(Hieratic)로 작업이 없는 날의 결근내용을 담았다. 작업과 휴무를 관리하던 ‘파라오 무덤 공사 노무일지’인 셈이다.

인류 역사 최초 파업은? B.C. 12세기 파라오 무덤 공사

노무일지 석회암 조각 옆에는 더욱 놀라운 유물이 기다린다. 여성 파라오 토스레트를 내치고 이집트 20왕조를 연 세트나크테(재위 B.C. 1185∼B.C. 1182년)의 아들 람세스 3세(재위 B.C. 1182∼B.C. 1151년) 시기 쓰인 파피루스다. 1824년 박물관 개장과 함께 지금까지 전시 중인 이 파피루스 내용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파업 이야기다. 당시 왕실 서기 아멘나크트(Amennakht)가 신관문자로 기록한 내용을 보자.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 무덤 공사를 위해 고용된 노동자들이 노동의 대가로 약속된 식량이 제공되지 않자 작업 현장을 떠나 파업을 일으킨다. 현장 감독관들이 매를 들었을까? 아니다. 일터로 되돌려 보내려 무진 애를 쓰며 설득했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노동자들이 겁을 먹고 순순히 작업장으로 복귀했을까?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 입장은 단호하다. 약속을 지켜 의약품과 물고기, 야채를 달라며 여러 날 동안 파업을 이어간다.

이집트인들은 파라오를 지상의 신 호루스의 현신으로 여겼다. 법률이 발달한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이집트 파라오가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배경이다. 영생을 믿던 파라오들은 즉위와 동시에 자신의 무덤 공사에 들어갔다. 파라오 무덤 공사는 가장 중요한 국책사업이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약속된 보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파업을 벌였다. 신정국가(神政國家)에서 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었던 3200여 년 전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 오늘날의 현실에 비춰보며 역사란 무엇인지 되묻는다.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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