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조선 여성의 일생’

"평교자를 금했지 걸어 다니지 말란 법은 업잖은가?" 평교자는 사방이 막히지 않은 들것 모양의 가마다. 조선시대 양반 여성은 평교자를 탔지만, 태종은 3품 이상 정실부인의 평교자를 금하고 옥교자를 타게 했다. 평교자를 타면 가마를 부축하는 종들과 옷깃을 스치며 허물없이 가까워진다는 이유였다. 옥교자는 사방이 막혀있고 지붕이 있는 가마다. 이는 여성이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없도록 하는 조처였다. 그러나 이 조처가 내려지자 길거리를 버젓이 활보하는 여성이 늘어 조정을 곤혹스럽게 했다.

▲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펴낸 <조선 여성의 일생>은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조선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 글항아리

조선시대 여성은 거리 행사 구경을 즐겼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거나 왕이 행차할 때 양반 부인들은 장막을 설치하거나 누각 난간에 기대 구경했다. 성종이 농업을 장려하고자 밖으로 나와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 행사 때도 그랬다. 이날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자 여성들은 종과 헤어져 혼자 밤거리를 헤매거나 낯선 집에서 하루 묵기를 청하기도 했다. 이런 행태가 논란이 돼 중종은 부녀자의 관광을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구경을 삼가기는커녕 한껏 치장한 가마를 타고, 화장을 짙게 한 채 나들이를 했다.

주자학 이념에 따른 규제와 족보기재, 재산상속이 적자 위주로 이뤄지며 조선은 종법 질서에 기반을 둔 가부장제 사회가 됐다. 여성의 행동과 삶을 규제하는 제도는 권력을 가진 남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세밀하게 다듬어졌다.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상도 가부장제도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으며, 한국 사회에서 '전통 여인상'의 원형으로 그려졌다. 조선시대 제도가 만들어낸 여인은 지금 한국 사회의 남성 중심적 담론에서 부활하여 편향된 성 정체성을 구성하는 주요 근거로 작용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엮은 <조선 여성의 일생>에는 ‘조선시대 자료를 보면, 국가에서 금지한 음사에 참가해서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는 사대부집 부녀에서부터 떼 지어 몰려다니는 비구니들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조선의 여성'과는 사뭇 다른 이들을 만나볼 수 있다’고 했다. 또 ’조선시대 여성의 삶은 남성에 의해, 위로부터 부과한 규제의 영향을 받지만 그것에 은밀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맞서고 대응해온 역사를 감추고 있기도 하다’고 했다.

가부장제가 자리 잡기 시작한 조선시대는 권력을 쥐고 있던 남성들이 모든 기록의 주체가 되는 사회였다. 이런 시대에서 여성의 욕망과 성취는 가려진 채, 남성이 기록하고 상상한 여성의 모습만이 기록에 남아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아닐까? 조선의 여성은 우리가 알던 '전통 여인상'과 달리 당대 만들어진 금제를 위반하거나, 규제를 넘나드는 존재였다. 이들의 존재는 현대 가부장제 사회가 부여하는 성 역할이나 성 정체성 등 고정관념과 차별에 균열을 내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 '탈코르셋 운동'은 한국 사회가 부여하는 성 역할과 성 정체성에 균열을 내는 시작점이다. ⓒ MBC

최근 한국 사회에서 '탈코르셋 운동'이 활발하다. 탈코르셋 운동은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미의 기준'이나 '꾸밈'에서 자유로워지는 걸 말한다. 코르셋은 여성의 체형을 보정하는 속옷으로 짙은 화장이나 긴 생머리 또는 여성에게 강요하는 성 역할 등이 한국 사회의 코르셋으로 작용해 여성을 옥죄어 왔다. 이런 코르셋은 여성에게 자신의 외모를 혐오하게 하거나, 꾸밈을 여성이 원하는 쾌락으로 인식하게 했다. 탈코르셋 운동으로 여성이 맨 얼굴을 드러내자 성 고정관념과 성차별 같은 가부장제의 민낯도 함께 드러났다.

일부 언론은 탈코르셋 운동의 본질을 왜곡하기도 한다. <한국경제>는 ’탈코르셋 운동이 취향의 영역에 지나치게 개입해 오히려 본래 취지인 '다양한 여성상'을 퇴색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고 했다. 이는 논쟁을 통해 의식을 넓혀가는 과정을 여자와 여자 간 갈등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여자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서는 안 된다'며 여성의 욕망과 세상의 변화 의지를 꺾어왔다. 지금은 다르다. 사회가 무수히 덧씌운 코르셋을 벗겨내기 위해 공감하고 연대해야 할 때다.


편집: 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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