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사랑과 연대에 관한 단상

▲ 조현아 PD

‘삶’의 의미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옆에 두었을 때 가장 극명히 드러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인식은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지금 당장은 찬란하고 반짝거리는 것들도 죽음과 대비했을 때는 힘을 잃고 무색해진다. 인간에 관한 사유는 ‘삶과 죽음에 관한 물음과 답변’일 따름이다. 삶에 관한 질문과 사유는 죽음의 연장선 위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누군가는 말했다. 그에게 사과나무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자 삶의 ‘무엇’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떨까? 죽음을 앞둔 순간에 나는 내 삶의 ‘무엇’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뻔한 답일 수 있지만 아마 ‘사랑’이라 할 것 같다. 내일 죽는다면, 나는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 시간을 보낼 것이다. 미처 못다한 얘기와, 충분히 하지 못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겠다. 함께 보낸 시간과 소중한 추억을 곱씹어보며 동틀 때까지 대화와 눈빛을 나누겠지. 그렇게 가슴 전체에 퍼지는 따뜻함을 느끼며 차분히 생을 끝낼 것 같다.

임상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삶의 세 요소를 ‘사랑, 일, 놀이’라고 했다. 숱한 상담과 관찰의 결과, 사람들이 이 셋으로 삶의 동기를 얻고 채운다는 것이다. 사랑은 나뿐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삶의 가치이다. 사랑은 숱한 이별을 겪으며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외로운 인간이 존재의 근원적 고립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자, 누군가와 벽을 허물고 합일을 이룸으로써 고독과 분리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을 인간관계 전반으로 확장하면 ‘연대’가 된다. 연대는 누군가와 어디엔가 함께 속한 느낌을 나누며 ‘연결됨’을 추구하는 것이다. 고립된 스스로를 넘어 속한 사회, 공동체, 세상과 연결을 확장하고, 능동적으로 융합하여 공동의 선을 이뤄내고자 하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타인과 분리시키는 벽을 허물어버리고 타인과 일치시키는 힘"이라고 했다. 이 정의를 모든 인간 관계로 확장해보면 '연대'가 된다. ⓒ pixabay

하지만 현실에서는 연대를 이야기하기 힘들다.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볼 새 없이 자기 것을 챙기고, 제 몫을 해내기도 바쁘다. 저성장경제, 승자독식체제는 극심한 생존 압박과 무한 경쟁을 불러왔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끊임없이 자기 기능을 입증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가치 없는 인간이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본질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로 인간의 값이 매겨지는 사회다. 사랑하는 관계인 사랑마저도 교환양식에 지배받는다. 승자에게는 영광과 혜택이, 승리하지 못한 자에게는 그만큼의 빈곤과 소외가 물려진다. 기능주의와 인간소외가 맞물리는 구조 속에서 ‘연대’는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것이 될 뿐이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삶의 질 지표’는 우리 사회의 연대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보여준다. 교육, 안전, 문화, 여가 등 한국인 삶의 질을 나타내는 지표 중 10년 전보다 낮아진 것은 ‘가족, 공동체’ 영역이 유일했다. 가족관계 만족도, 지역사회 소속감, 사회적 관계망의 긴밀도를 나타내는 수치가 다 낮아졌다. 이 결과에는 한 부모 가구, 독거노인 비율, 자살률 증가가 영향을 미쳤다. 말하자면 생존 경쟁에서 낙오하고 모든 연대로부터 벗어나 사회적 고립과 죽음을 맞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송파 세 모녀 사건, 구미 부자 사건, 노인 고독사… 사회의 가장 기본적 고리인 가족, 공동체, 지역관계망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씁쓸한 시대 단면을 잘 보여준다.

톨스토이는 말했다. “무한히 진화하는 문명 속에서 인간의 죽음은 무의미하다. 죽음이 무의미하기에 인간의 삶 또한 무의미한 것이 된다.” 끝없이 발전을 요하는 사회에서 하나의 도구로서만 기능하며, 각자도생하기 위해 타인의 고립과 죽음에도 무감각해야 하는 삶은 의미 있다고 보기 어렵다. 타인의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내 죽음 또한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인간의 죽음과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사회, 그 사회에서 당장 오늘의 가치를 좇으며 바쁘게 사는 삶과 그 과정에서 쌓아온 모든 수고와 관계가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다른 인간 옆에 있음으로써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다. 마르틴 부버가 말했듯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닌, 다른 인격과 공존관계를 맺으며 실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곁 연대를 표하며 사는 많은 이들을 떠올려 본다. 관객과 끊임없이 교감하는 배우, 자연을 닮은 아름다움을 그리는 예술가, 광화문을 가득 밝힌 촛불 집회, 불길 속 이웃을 구한 초인적 의인까지. 자신이 속한 세상에 표현하는 모든 진실된 감정과 소속감, 능동적으로 맺은 유기적 관계가 인간의 삶을 살아있게 만든다. “당신은 무엇으로 사는가?” 훗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타인과 벽을 허물고 맺은 따스한 연대가 내 삶을 이루었다고.


편집 : 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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