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플라스틱의 눈으로 본 세상

한국이 극심한 갈등사회가 된 것은 자기만 이롭게 하려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발상에 너무 빠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좌우, 여야, 노사, 세대, 계층, 지역, 환경 등 서로 간 갈등 국면에는 대개 인간, 특히 강자나 기득권층의 자기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간이 넓어져야 할 때입니다. 그런 생각과 풍자가 떠오르는 이는 누구나 글을 보내주세요. 첨삭하고 때로는 내 생각을 보태서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봉수 교수)


▲ 조현아 PD

“주물하라. 나를 통해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을지니. 외치라, 플라스틱!” 마법의 주문을 알려줄게. 방법은 간단해. 내 이름을 부르면 돼. P-L-A-S-T-I-C. 이상한 사이비 주문 같다고? 아니야. 인간은 플라스틱 세상에서 마법사처럼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어. 바로 나 만능 플라스틱이 그것을 가능케 하니까.

Plassein이란 그리스 어원처럼, ‘주물하다’ ‘형태를 만들다’가 원래 내 뜻이지. 많은 이들이 ‘플라스틱’ 하면 정형화한 명사, 틀이 있는 물체를 떠올리지만 사실 나는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동사’ 같은 성질이라고. 그 정해지지 않음, 다양한 ‘변신가능성’(plasticity)이 내 특성이지. 폴리에틸렌, 아크릴, 스티로폼… 나는 무궁무진한 재질과 형태로 탄생할 수 있어. 나일론 하나만 해도 그래. 쭉쭉 늘어나는 스타킹으로, 빳빳한 칫솔모로, 까끌까끌한 밸크로 찍찍이로. 인간이 살아가며 접하는 물건 중에 내가 아닌 게 거의 없을 정도니. 어때? 플라스틱 마법이라 할 만하지.

특히 내가 빛을 발하는 것은 ‘일회용품’에서지. 나로 만든 것 중 절반이 일회용품이거든. 아, 그 기원은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전쟁 물질로 대량 생산되던 나는 전쟁 후 쓰일 곳이 없어졌어. 까딱하면 무용지물이 되게 생긴 거야. 그때 천만다행으로 날 생산하던 기업들은 날 일상생활에 보급했지. 전쟁의 험난함에 맞춰 내구성 있게 제작된 물건들이 평상시 수명 짧은 편의품에 들어오게 됐어. 이를테면 물에 뜨고 절연∙단열 기능이 있는 스티로폼은 해안가 구명보트가 아니라 빛나는 아이스박스로, 고주파를 막는 폴리에틸렌은 샌드위치 용기나 드라이크리닝 비닐로 변했어. 놀랍지 않아? 석유 찌꺼기였던 나한테서 이런 풍부한 가공품이 창출되다니! 일회용의 혁명이라 할밖에.

▲ 플라스틱이 점령한 세상의 '플라스틱화'한 인간들. 인간은 플라스틱보다 수명이 짧다. ⓒ pixabay

뭐. 누군가는 나를 비난하기도 하더라. 내가 ‘버리는 문화’를 만들었다면서. 고장이 나도 쉽게 고치거나, 오래 쓰기 어려우니 뭐든지 버리는 습관을 인간에게 심어줬다는 거야. 아니, 근데 그게 뭐 내 잘못인가? 인간 역사상 적은 비용으로 ‘풍부함’을 누리는 게 나쁜 일이던 시기가 있었냐고? 나는 편리하고, 안락하고, 무엇보다 값이 싸며, 무수히 생산할 수 있지. 심지어 쓸 때마다 새것 같은 기분이 드니. 그 소비의 매끈함을 나 말고 누가 줄 수 있겠어? 이미 인간은 나에게 의존하게 됐다고. 그건 해마다 늘어나는 내 생산량이 말해주지. 21세기 첫 10년간 만들어진 내 양이 20세기 전체 생산량과 맞먹을 정도라니까.

이렇게 만능인 나지만, 요즘 들어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자꾸 들려. 전 세계에서 내 사용을 줄이겠다거나 전면 사용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한다는 거야. 날 처리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고, 환경을 오염시킨다나 뭐라나… 특히 시끄러웠던 나라는 한국이야. 아니, 세계에서 나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 인간들이 갑자기 중국에서 재활용 원료로 받지 않겠다니까 난리가 난 거야. 자기네 쓰레기통이 넘치고, 분리수거 할 곳이 없어지니까 그제야 내 사용과 처리에 집중하는 거지. 한 사람이 한 해 420개 비닐봉지를 쓰고, 일회용컵도 하루 7천만개, 연간 257억개를 쓰는 나라가 새삼 왜 난리람? 어휴! 분명 나 없음 제일 불편할 거면서.

사실 큰 걱정은 안 해. 어차피 난 그들보다 훨씬 이 지구에서 오래 살 거 거든! 그들은 나를 봉지로 평균 20분 잠깐 쓰고 버릴지 몰라도, 나는 400년 넘게 버틸 수 있다 이거야. 썩거나 부서지지 않으니까. 인간에게 ‘풍부함’을 제공한 데는 그만큼 값이 있지 않겠어? 이미 나는 지구 곳곳을 점령하고 있지. 땅 속, 바다 속, 그 안의 미세 플라스틱을 먹는 모든 생물들의 뱃속. 내가 없는 곳은 없어. 있잖아, 인간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랬지? 사실 진짜 플라스틱 마법은 뭔지 알아? 이미 그들은 나 없이 못 사는, 신체 일부가 나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플라스틱 인간’이 되었다는 거야, 내가 부리는 마법 때문에. 내가 점령한 세상, 플라스틱 공화국! 그게 내 마법이야.


편집 : 김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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