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벽에 갇힌 장애인 미투, 나홀로 외로운 싸움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실태 폭로로 시작된 우리 사회의 ‘미투 운동’이 흐지부지되는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세상에 제대로 알리지도 못하고 관심권 밖에 내팽개쳐진 외로운 ‘미투’가 있다.

“잊고 살았던 기억이 다시 살아납니다. 다시는 생각도 하기 싫었는데…. 꿈에도 나타나 악몽에 시달려야 했고, 뒤돌아서면 눈물이 치솟고… 자라나는 내 아이들 모습을 보면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서러움이 북받쳐 오릅니다. 장애 여성이라서, 약자여서, 힘이 없어서“

초등학교 때 병을 앓고 나서 지체 장애 1급의 장애를 안고 사는 서울장애여성인권연대 대표이자 장애여성자립생활센터 '파란'의 박지주 소장(47). 박 소장은 6일 단비뉴스와 인터뷰에서 “16년 전에 당한 성추행 가해자가 장애인이동권 투쟁 영상에 나오고 있어 삭제요청을 했는데, 다섯 달이 넘도록 진전이 없다”고 말했다. 박 소장이 힘겨워하는 것은 영상에서 가해자를 삭제하는 문제만이 아니다. 장애인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나 기관들의 태도와 세상의 무관심이 더 힘들다.

박 소장이 미투 운동에 동참하듯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은 지난달 17일. 이날 오후 두 시 서울 중구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입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였다. 박 소장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가 배포 상영 중인 장애인이동권 투쟁 영상인 ‘버스를 타자’의 내용 중에 16년 전 본인을 성추행한 ㅇ씨의 모습이 나와 삭제를 요청했지만 4개월이 넘도록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전장연의 조처 미흡을 비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4명의 기자만 참석했고 그날 회견내용은 메이저 신문 방송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 서울장애여성인권연대 박지주 소장과 회원들이 지난달 17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박 소장에 대한 2차 가해 중단요구에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박경민

박 소장은 작년 하반기에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교육을 위해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협의회에서 장애인이동권 투쟁 집회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 ‘버스를 타자’를 입수했다. 작년 9월쯤 그 영상을 본 박 소장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16년 전에 자신을 성추행했다가 퇴출당했던, 비장애인 출신의 당시 장애인이동권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이하 이동권연대) 사무국장 ㅇ씨의 모습이 영상에 버젓이 나오고 있었다. 박 소장은 성추행을 당했던 2002년의 기억이 떠오르며 몸에 열이 오르고 손이 떨렸다. 집에 돌아가서도 영상에 나온 ㅇ씨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성추행 가해자가 인권 교육 영상에 나오지’라는 분노와 ‘그냥 모른 척 지나갈까’하는 고민으로 고통스러운 날을 보냈다.

비장애인 활동가가 강압적으로 성추행

박 소장이 꿈에도 다시 생각하기 싫은 일을 당한 것은 2002년, 박 소장이 31살이 되던 해였다. 장애인 교육권 투쟁을 하던 늦깎이 대학생은 자연스레 이동권연대와 함께 현장으로 나가 집회를 했다. 그곳에서 비장애인으로서 이동권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하던 ㅇ씨를 만났다. ㅇ씨는 이동권연대를 대변하고 집회 현장을 총괄하는 핵심간부였다. ㅇ씨가 어느 날 바람 쐬러 드라이브나 가자고 제안했을 때 박 소장은 별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다. 장애인 운동을 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집회 현장에서 항상 마주치는 동지 같은 느낌이라 아무 걱정 없이 함께 나갔다고 한다.

박 소장은 그날 몇 시에 어디로 갔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차 안에서 엄씨가 강압적으로 성추행을 했다는 사실만 뚜렷하게 기억할 뿐 나머지는 충격으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초등학생 때 결핵성 척추염으로 지체 장애 1급이 된 박 소장은 차 안에서 비장애인 남성의 강압적인 성추행 시도에 저항하기 어려웠다.

박 소장은 집으로 돌아와서 자책도 했다고 한다. ‘더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지 않았을까…’ 성추행을 당한 사실 자체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부끄러웠다. 박 소장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돌보지 못한 그때의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사건 이후, ㅇ씨는 박 소장이 가는 곳 어디에나 있었다. 박 소장은 같은 해 한국장애인인권상을 받으러 간 서울 63빌딩에서도, 제6회 세계장애인대회가 열린 일본 삿포로에서도 ㅇ씨와 마주쳤다. ㅇ씨의 얼굴을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성추행 가해자와 공적인 장소에서 마주해야 하는 박 소장은 고통스러웠다. 그를 만날 때면 위축되어 점점 장애인 인권 활동을 줄여나갔다.

장애인 운동가들이 성추행 문제 제기에 ‘피로감’ 전해

박 소장은 한동안 이처럼 고통 속에 지내다 그 이듬해에 이 문제를 제기했다.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박 소장을 돕기 위해 장애인 단체들이 모여 대응팀이 꾸려졌다. 장애인 사회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 등을 요구한 결과 ㅇ씨가 두 차례 사과문을 내고 이동권연대가 ㅇ씨를 장애 운동계에서 영구제명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는 등으로 일단락됐다.

▲ 박 소장을 성추행한 가해자 ㅇ씨가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영상 <장애인 이동권 투쟁보고서 : 버스를 타자!>의 한 장면. © 다큐인

그러나 당시 이 문제를 제기해 가해자에 대해 조처를 하는 과정에서 일부 장애자 단체 인사들의 태도가 박 소장을 괴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ㅇ씨 성추행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꾸려진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에 참여한 배복주 대표(당시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장현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가 박 소장에게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전했다고 한다. 당시 배 대표가 ‘박 소장 성추행 가해자 처리 과정에서 이동권연대 관계자들이 힘들어한다’는 뉘앙스를 주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피해자임에도 주위에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배 대표는 지난달 11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조력자의 역할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사건 해결을 위해서 논의하고, 힘을 공유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라며 ‘해당 발언은 가해자를 감싸기 위한 발언이 아니라 대책위의 상황과 분위기를 전하기 위함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배 대표는 지난달 24일 단비뉴스와의 통화에서 “제가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당시 회의록 등을 확인했는데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며 “박지주 씨가 (내가 그 말을 했다는) 증거가 될 기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이런 상황에서 더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진행해 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ㅇ씨에 대한 형사 고발을 포기했다고 한다.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을 부담스러워 하는 듯한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다시는 그날 일을 떠올리며 사람들에게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주변 장애인 활동가들이 ‘이제 그만해라’, ‘계속하면 너만 힘들다’고 하는 말도 듣기 싫었다. 박 소장이 ㅇ씨의 사과문을 받아들이고 이동권연대 활동을 중단하는 것으로 성추행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박 소장은 이렇게 마무리된 사건이, 가해자 ㅇ씨가 장애인이동권 투쟁 영상에 등장하면서 2차 가해로 확대된 후 다시 고민에 빠졌다. 박 소장은 지인을 통해 ㅇ씨가 2013년 중반까지 부산장애인이동권연대에서 정책국장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ㅇ씨가 서울에서 퇴출된 뒤 부산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뒤늦게 성추행 사실이 드러나 부산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부산장차연)에서 제명됐다는 사실을 알고, 절대로 놔두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2차 가해를 중단시키기 위해 영상에서 ㅇ씨 모습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작년 하반기쯤, ‘전장연’으로 바뀐 이동권연대 관계자들과 접촉했다. 관계자들은 그러나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거나 시간을 끌면서 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라는 식으로 박 소장의 요청을 회피했다. 어떤 관계자는 요구사항을 이메일로 보내라며 행정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을 문제 삼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박 소장은 실무자들이 민원제기에 대해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자 지난 연말 전장연 박경석 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성추행 가해자가 나오는 영상장면 삭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박 대표는 “판단이 안 선다. (영상을 제작한) 감독은 죽었다. 아무도 모른다”고 답변했다고 박 소장은 말했다. 이와 관련 박 대표는 단비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피해자가) 가해자가 들어간 영상을 상영한 것이 2차 가해라고 규정하길래 (...) 관객들이 가해자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영상을 틀었다는 것 자체가 2차 가해가 될 수 있느냐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했다.

되풀이되는 지난한 문제 제기 과정

박 소장은 전장연 측의 이 같은 대응으로는 2차 가해가 해결되기 어렵다고 판단, 지난 4월 12일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열린 ‘장애여성권리쟁취를 위한 기자회견’에 참석, 회견 도중 자신의 성추행 2차 가해로 인한 피해를 언급하면서 ‘장애인 미투’를 선언한다고 했다. 박 소장은 2차 가해에 대한 미온적 대응 등을 이유로 전장연 박 대표와 배 대표의 사퇴도 요구했다. 이에 전장연 측은 해명과 사과가 담긴 입장문을 발표했으나, 박 소장은 “해명과 사과가 진정성이 없고, 영상 삭제에 대한 언급이 없다”며 지난달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전장연을 규탄하고 나선 것이다.

박 소장과 서울장애여성인권연대 회원들은 이어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아가 지난 1월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으로 임명된 배 대표 사퇴를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장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장을 대신해 나온 서수정 운영지원과장은 “인권위는 (배 비상임위원에 대한) 인사권이 없다”고만 말하고 추가 조처는 취하지 않았다.

박 소장 측은 “인사권이 없다고 한다면 청와대에 민원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며 오는 10일 청와대에 ‘배복주 인권위 비상임위원 사퇴요구’를 내용으로 한 등기를 발송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박 소장(오른쪽)과 서울장애여성인권연대 안은자 사무총장(왼쪽)이 국가인권위를 찾아가 서수정 인권위 운영지원과장(가운데)에게 배복주 비상임위원 사퇴를 요구하는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 김소영

인권 교육 영상 속 가해자의 얼굴

박 소장 측은 전장연 측이 성추행 가해자가 등장하는 영상화면 삭제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자 문제의 영상을 제작한 다큐인 측과 접촉하면서 삭제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박 소장을 돕고 있는 서울장애여성인권연대 안은자 사무총장이 지난 3일 다큐인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삭제요구를 하자 다큐인 측은 “우리는 편집권이 없고 배포권만 있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다큐인 소속 송윤혁 감독은 지난달 29일 단비뉴스와의 전화에서 “(영상 편집은) 법적인 문제가 아니다. 연출자가 어떤 생각으로 그 장면을 넣었는지 모르니까 수정할 수 없다. 더군다나 가해자가 나온 부분은 (영화 내에서) 역할이 있기 때문에 수정해서 다시 완성하려면 다른 영화가 될 거다”라고 말했다. 박 소장에 대한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2002년 초반 배급되기 시작한 故 박종필 감독의 다큐멘터리 <버스를 타자>는 장애인 이동권 운동 역사를 기록한 영상자료다. 다큐인 측은 박 소장에게 영상 배급과 관련해 논의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에 박 소장은 “소극적인 대응이다. 다큐인이 피해자의 입장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가해자 부분을 삭제하고 영상에서 파악한 감독의 의도에 맞춰 재편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정명의 이유리 변호사는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관행적으로 영화창작자와 제작자의 계약에 의해 제작자가 전적으로 위와 같은 저작 인격권을 행사하게 되어 있으므로, 이 사건 영화의 경우에도 제작사가 계약 때문에 위와 같은 권리를 양도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영화제작사에 감독과의 계약 내용을 확인해 권리를 양도받는 내용의 계약조항이 있다면 제작사와 협의를 통해 가해자가 나오는 장면을 편집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법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해결할 길이 있는데도 관련 당사자나 단체, 그리고 정부 유관부처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어 ‘장애인 미투’에 대한 2차 가해는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편집 : 장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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