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수상작/첨삭후기

[제시어] ‘삶’

[우수작]

김이현 (경희대 국어국문학) '내 삶은 내 것이 아니었다'

김정록 (한국외대 루마니아어) '열심히 일한 뒤 놀겠다던 엄마'

김태형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비관과 낙관으로 버텨야 하는 것'

남지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살려는 노동으로 죽어가는 이들'

박강수 (성균관대 철학) '너의 이름은 너를 의미할까'

박상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윤연정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흘러가는 시간과 결정적 순간'

‘16기 대학언론인 캠프’가 끝나고 두 달이나 지나 수상작을 발표하게 됐습니다. 캠프 직후 첨삭을 해뒀지만 지난 학기 수업의 결과물들을 <단비뉴스>에 출고하느라 발표가 늦었습니다. 예년처럼 캠프 참가자들이 낸 글과 재학생들이 방학특강 때 낸 글 중에서 7편을 수상작으로 골랐습니다. 김태형군은 캠프에 참여하고 저널리즘스쿨에도 진학했으니 의도적인 건 아니지만 절반씩 안배된 셈입니다.

▲ 1월 5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열린 '대학언론인 캠프'에 전국의 예비언론인 56명이 참여했다. ⓒ 임형준

수상자에게는 약속대로 지난해 쓴 책 <중립에 기어를 넣고는 달릴 수 없다>를 선물하겠습니다. 한국사회를 언론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재학 중 또는 방학캠프 때 좋은 글을 써내 내 책을 상으로 받은 이도 여럿인데 그들에게는 근래에 내가 읽은 책 가운데 꼭 읽혔으면 하는 책 한 권을 선물하겠습니다.

<청년, 리버럴과 싸우다>가 바로 그 책입니다. 청년 셋이 쓴 이 책은 ‘리버럴’ 정권이 재출범했지만 그들마저 기득권층이기에 정치의 상식을 복구할 수는 있어도 ‘헬조선’ 소리를 듣는 우리의 삶을 바꿀 수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리버럴’(Liberal)이 진보로 불리는 곳은 미국과 그 나라를 표준으로 삼는 한국 같은 국가들인데, 이들 나라의 민주당은 유럽에 갖다 놓으면 중도보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수와 중도보수가 번갈아 집권하니 서민의 이해를 대변할 정치세력이 없어 세계 최강국이라 자랑하는 미국이 ‘복지 후진국’이라 조롱받고 경제대국이라 자부하는 한국이 ‘헬조선’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저자들은 한국의 ‘리버럴’이 탐닉해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낡은 사고’라고 비판합니다. 그들은 한국사회를 바꾸기 위해 깨뜨려야 할 우리 안의 포스트모던으로 중도주의, 합법주의, 자유민주주의, 비폭력주의를 꼽으면서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진보를 꿈꿉니다.

수상자는 주소를 내 메일(hibongsoo@hotmail.com)로 알려주면 인터넷서점에서 구입해 바로 보내겠습니다. 수상작은 <단비뉴스>에 첨삭본과 함께 실을 예정이고 수상하지 못한 글도 첨삭본을 필자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첨삭 후기는 첨삭된 내용으로 대신하고, 오래 전과 최근에 읽은 책들을 되새김질하며 우리와 다르게 살아간 이들이 어떤 삶의 태도를 가졌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인디언처럼 살았더라면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밤에 날아다니는 불나방의 번쩍임 같은 것. 한겨울에 들소가 내쉬는 숨결 같은 것. 풀밭 위를 가로질러 달려가 저녁노을 속에 사라져 버리는 작은 그림자 같은 것.’

블랙푸트 족 인디언 추장이 임종 직전에 한 말이다. 미국 인디언의 역사와 애환을 기록한 책은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등 수없이 많지만, 그들의 삶과 정신세계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데는 최근 류시화 시인이 엮은 902쪽짜리 인디언 연설문집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가 압권이다.

인디언은 자연에서 할 말을 배우지만, 그것은 음풍농월이 아닌 실천철학이며 삶을 대하는 태도다. 테와 푸에블로 족 언어에는 ‘듣는 것’을 뜻하는 단어가 ‘행동하는 것’을 함께 의미한다. 인디언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어머니인 대지의 자식이며 생태계의 일원일 뿐이다. 한 그루 나무도 자신의 삶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디언은 백인이 크리스마스 때 밑동째 잘라버리는 나무들을 애도한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은 인디언 혼혈인 위렌 상원의원을 ‘포카혼타스’라고 조롱한 일이 있다. 백악관 대변인은 “악의가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트럼프의 말에는 인디언을 ‘멸족’ 위기로 몰아넣은 백인이 자신의 만행을 반성하지 않는 심리가 드러난다. 인디언 추장과 그의 딸 포카혼타스는 자기네를 공격하는 백인들에게 “우리와 평화롭게 만나자”고 호소하지만 학살이 계속된다. 영화 <포카혼타스>에서 인디언들은 노래한다.

‘당신들은 자신들이 발을 딛고 선 땅이면 어느 곳이든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지는 당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죽은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모든 바위와 나무와 동물들이 저마다 하나의 삶과 영혼과 이름을 갖고 있음을. …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결코 끝나지 않는 하나의 원, 하나의 둥근 고리 속에.’

인디언에게는 원래 자연에 관한 소유 개념이 없고 공동 이용 개념만 있었다. 백인이 뉴욕 맨해튼을 24달러어치 잡화로 사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지 워싱턴에게 보낸 전쟁 담당관의 편지에는 ‘인디언에게 재산 소유 개념을 심어주어야 장사에 성공할 수 있다’고 쓰여있었다. 그러나 다코다 족 현인은 이렇게 말한다.

‘백인은 삶의 목표를 오로지 더 많이 소유하는 것, 더 큰 부자가 되는 것에 두고 있다. … 우리 인디언에게는 은행이라는 것이 없다. 우리는 돈이나 담요가 남으면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필요할 때는 그들한테 얻어 쓴다. 주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은행이다.’

우리나라에는 한때 “부자 되세요”가 국민적 덕담이었고, 민노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구호마저 “살림 좀 나아지셨습니까”였다. 진보정당의 구호는 ‘생존권 확보’를 강조한 말일 수도 있겠으나, 물신주의가 우리에게 얼마나 깊이 침투해있는지를 알 수 있는 말들이다.

필요한 만큼만 채취하거나 사냥하고 동식물의 생명까지 존중하는 인디언에게 ‘게으르고 잔인하다’는 낙인을 찍은 것은 백인 미디어였다. 1863년 <로키 마운틴> 신문의 사설은 인디언을 ‘방탕한 떠돌이이며, 잔인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인종이기에 지구상에서 쓸어 없애야 한다’고 썼다.

인디언을 대량학살한 셔먼 장군은 “올해 가능하면 많은 인디언을 죽여야 한다, 내년에 덜 죽여도 되도록”이라고 역설했다. 미국에서 존경받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인디언 학살 사건과 관련해 “나는 죽은 인디언만이 좋은 인디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의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흑역사를 제대로 반성한 적이 없기에 21세기에 들어서도 인디언을 죽이는 서부극을 유난히 즐겨보던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 아무 상관 없는 이라크를 침공해 나라를 가루로 만들고 수십만을 죽였다. 자원민족주의를 내세운 이라크의 석유가 욕심났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큰 소유욕의 대상은 생명, 곧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일 터이다.

‘인디언의 삶 속에는 죽음의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다.’ (진 켈루체: 윈투 족)

인디언이 죽음마저 초탈할 수 있었던 것은 대지의 자식이 자연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일 터이다. 보통사람은 물론이고 고승들도 죽음을 앞두고 초연하기는 힘들다. 샌프란시스코 선원 설립자인 스즈키 선사가 암과 싸우다가 임종 때 한 말은 “난 죽고 싶지 않네”였다.

‘무소유’를 설법한 법정 스님도 막상 생명을 놓아 보낼 때는 죽음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의 책을 출간한 샘터사의 김성구 사장이 그의 죽음을 지켜본 뒤 내게 전해준 말인데, 오히려 인간적 면모가 느껴진다. 법정 스님은 1987년 6월항쟁 국민운동본부에도 참여를 거부해 지선 스님이 인터뷰에서 섭섭함을 토로한 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간신히 처형을 면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썼다.

‘한 인간한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어도 한 가지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삶의 태도만큼은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자유다.’

이봉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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