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거대건축 콤플렉스'

▲ 박진홍 기자

"요새 부산 3대 자랑거리가 돼지국밥, 롯데 자이언츠, '마린시티'다 아이가?" 겨울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내게, 부산 토박이 친구들은 마린시티 자랑을 늘어놓았다. 동백섬 앞 마린시티는 형형색색 고층 건물이 바닷물에 비치는 야경이 절경이어서 유명해진 부산의 새 명소다. 유리로 뒤덮인 40~80층 호텔과 주상복합아파트 10여 채가 빽빽이 들어선 신도시로, 부산에 '마천루의 도시'라는 수식어를 안긴 곳이기도 하다.

친구들은 "만년 '제2의 도시' 부산이, 고도제한 등으로 마천루를 쭉쭉 올리지 못하는 서울을 높은 건물 개수로라도 이기니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그들 중 마린시티에 사는 사람은 없지만, 부산을 '아시아의 뉴욕' 소리까지 듣게 만든 마린시티는 먼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좋은 자랑거리다.

아름답고 속 시원한 원경(遠景)과 달리, 마린시티 주민들이 보는 근경(近景)은 마냥 아름답지는 않다. 외벽을 유리로 감싼 탓에 대낮엔 찜질방이 되고, 밤에는 건물 사이가 가까워 남의 집 거실이 훤히 다 보인다. 이 때문에 온종일 블라인드를 치니, 안방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건 TV 광고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출퇴근길에는 강풍이 뺨을 사정없이 때리고, 태풍이 오면 도로는 물바다로 변한다.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방풍림과 방파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사람 살기 불편한 것보다 자랑거리 하나 더 늘리는 게 중요한 걸까? 마린시티 반대쪽, 해운대 바닷가 왼쪽 끝에는 85~101층짜리 주상복합 '엘시티'가 또 하늘을 긁을 기세로 치솟는다.

▲ 겉과 속이 다른 마린시티. ⓒ flickr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포식자 사자를 만난 가젤이 껑충껑충 제자리 뛰기를 하는 이유를 '힘의 과시'로 설명한다. 나는 이렇게 높게 뛸 만큼 힘이 있으니, 나를 잡지 말고 다른 가젤을 잡으라고 사자에게 '어필'하려고 높게 뛴다는 것이다. 마린시티 같은 '빛 좋은 개살구' 마천루에도 돈 있고 권력 쥔 사람들이 "나는 이 정도 큰 건물을 짓거나 살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욕구가 담겼다.

나아가 쉽게 옮기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 건축물을 남겨 대대손손 자신의 힘을 전하려는 의도도 담겼다. 건축비평가 데얀 수딕은 권력자들의 이런 심리를 '거대건축 콤플렉스(The Edifice Complex)'라 불렀다. 모아이 석상을 세운 이스터섬 사람들, 8만평짜리 총통 관저를 지은 히틀러, 거대 동상을 곳곳에 세운 소련 지도자와 월스트리트에 마천루 숲을 만든 자본가까지, 거대건축 콤플렉스는 이념과 시대를 관통한다.

높이 뛰며 자기 힘을 과시하는 가젤이지만, 실제로는 사자를 이길 만큼 강하지 않다. 거대 건축물에 집착하는 권력자들도 마찬가지다. 무리하게 대형 건물을 짓다가 낭패를 본다. 성남시는 3,222억원을 들여 호화 시청사를 지은 이듬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시공 계약이 계속 불발된 엘시티도 '100층 마천루'에 집착하다가 전방위 로비와 특혜·비리로 얼룩져 완공 전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엘시티 비리의 피해는 돈 대고 거주 불편을 겪는 시민들 몫이다.

2일에는 엘시티 공사장 구조물이 추락해 하청업체 노동자 4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도 시민들은 당장 눈 앞에 펼쳐진 마천루의 웅장함과 그럴듯한 수식어를 내가 사는 도시의 자랑거리로 여긴다.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 형태를 기술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는 실수가 가장 심각하다"던 철학자 베이컨의 지적이 꼭 들어맞는다.

▲ 지난 2일 공사장 외벽 구조물이 추락해 노동자 4명이 숨진 엘시티 사고 현장. ⓒ MBC <뉴스데스크>

7대 광역시 중 작년 부채비율 최고, 올해는 재정자주도 꼴찌. 마린시티가 위용을 뽐내는 부산시의 속 사정은 '아시아의 뉴욕'과는 거리가 멀다. 청년 실업률은 올 7월 기준 12.3%로 1997년 외환위기 수준인 전국 평균 10.4%보다 높고, 고령인구는 54만명(15.7%)으로 광역시 중 1위다.

'건축은 자의식 약한 사람들의 자의식을 부추긴다.' 역시 데얀 수딕의 지적인데, 거대건축 콤플렉스에 빠진 권력자와, 부양해야 할 사람은 많은데 일자리는 구하기 힘든 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부산 청년들에게 던지는 경고다. 자의식 약한 사람들의 마린시티를 향한 맹목적 찬양의 끝에는 '마천루의 저주'가 기다린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서 벗어나, 당장 눈앞에 존재하지 않지만 곪아 터지기 직전인 '가려진 문제'를 직시할 때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이연주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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